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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협동조합 운동의 특징과 의미

기사승인 2016.12.30  06: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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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크스, 엥겔스와 협동조합 - 2)

연재순서)

1) 들어가며 - 협동조합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오해의 기원

2) 초기 협동조합 운동의 특징

3) 마르크스 엥겔스 전기 저작에서 협동조합에 대한 내용

4) 마르크스 엥겔스 후기 저작에서 협동조합에 대한 내용

5) 결론 - 마르크스주의와 협동조합

초기협동조합 운동을 살펴보는 것은 우선 협동조합 본래의 의미를 올바르게 평가하는 것과 관련 있는 작업이다. 협동조합이 출발할 때 누가 무엇을 위해 협동조합을 만들었고, 어떤 철학이나 사상이 그들에게 있었는지를 확인하고, 당시 협동조합 사람들과 같은 시기를 살았던 마르크스, 엥겔스는 이들을 어떻게 봤는지를 점검한다. 이를 위해 본고에서는 협동조합운동의 ‘초기’는 18세기 후반부터 로치데일공정선구자조합의(Rochdale Equitable Pioneers Society, 이하 선구자 조합) 설립 시기까지로 한정하고자 한다. 주지하다시피 선구자 조합은 협동조합 운동에서 처음 성공한 조합이라고 알려져 있고, 현대에도 적용될 수 있는 협동조합 운동의 원칙이 수립되었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다만 초기 협동조합 운동에 대해선 마르크스 엥겔스의 인식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시기 마르크스 엥겔스는 협동조합 자체에 대한 평가보다는 초기 협동조합 운동을 주도했던 사람들에 대한 평가를 중심으로 서술한다. 따라서 본고는 마르크스 엥겔스의 평가가 있었던 사람중에서 특히 프루동과 로버트 오웬의 협동조합 이론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이 두사람에 대한 마르크스, 엥겔스의 평가 내용이 무엇인지만 확인해 본다.

 

1. 19세기 노동자들의 운동, 생활과 문화

초기 협동조합 운동을 논의할 때 이제 막 태동한 산업자본주의가 드러낸 문제점과, 제니 방적기로 시작하는 일련의 산업혁명 등에 대한 서술은 여기에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이에 대한 내용은 상당히 잘 알려졌고, 또 논점을 초기협동조합 운동의 구체적 모습에 한정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야만적인 초기 자본주의의 환경은 극악한 지옥 그 자체였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엥겔스가 쓴 ‘영국노동자 계급의 상태’를 참조하기 바란다.) 이때의 자본주의를 ‘자유경쟁 자본주의’라고 부르면서 19세기 후반 본격화되는 독점자본주의와 구별하고 있다는 점만 확인하도록 하자.

자유 경쟁 자본주의의 폐해에 맞서 영국의 경우 노동자들은 맨 처음 소위 기계파괴 운동을 통해서 저항했다. 기계 파괴 운동은 다시 인민헌장 6개조를1) 요구하면서 대두한 보통선거권 운동 곧 ‘차티스트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차티스트 노동자들은 저임금과 실업의 공포에 맞서 때로는 폭동의 형태로, 때로는 파업으로 맞섰는데, 공장주들은 이를 금지하기 위해 단결금지법을 제정해서2) 노동자들을 탄압했다. 탄압은 극심했고, 또 파업을 할 때마다 생계도 문제였다. 노동자들은 파업과정에서 동료 노동자에 대한 지원을 위해 조합을 만들었는데, 이런 조합형성 과정은 당시 상당히 일반적인 것이었다. 노동조합과 협동조합은 구별이 되긴 하였으나, 두 조직 모두 당시의 노동자운동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었다. 협동조합의 기원은 질병이나 실업 등에 대비하기 위해 평상시에 사람들에게 돈을 걷어 저축을 하고, 일이 발생했을 때 상호부조하는 조직, 즉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공제’조직이 있었다. 영국에서 이러한 조직은 <우애조합(Friendly Society)>으로 불렀으며, 빠르게는 17세기부터 설립했다고 기록에 남아 있다. 1793년에는 우애조합법을 제정하여 우애조합은 법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었다. 또한 18세기 중반이후부터는 물가가 급등하여 고통을 받고 있던 소비자들이 식료품의 공동생산이나 공동구입을 각 지역에서 시도하였다. 서민층들이 주도한 이러한 움직임이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은 많이 없기 때문에, 1760년경에 설립된 울 위츠와 채텀의 공동제분소나 1769년에 스코틀랜드의 펜윅에서 결성한 식료품공동구입조합이 기록상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사례로서 알려져 있다. 이때는 공제조합이기도 했으며, 협동조합의 형태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러한 전통은 노동자들이 돈을 모금하고, 협동하는 행위들이 대단히 일상적이었다는 점을 나타낸다. 따라서 노동조합운동과 협동조합 운동은 적어도 사람을 중심으로 볼 때는 거의 구분이 되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협동운동 초기에 사람들은 공산주의, 사회주의 그리고 각종 마귀가 들어 있다면서 심하게 반대했다.3) 1834년 영국에서 전국노동조합 대연합이 결성되었는데, 이 조직은 건설, 방적, 도자기제조, 재봉, 모직, 농업노동자 등의 큰 노조들을 포괄했다. 협동조합 운동의 창시자라고 인정받는 로버트 오웬이 조직의 결성을 주도했다.4) 아울러 “로치데일 조합을 만든 28인중 적어도 반은 확실한 오웬주의자”였다.5) 로치데일조합은 노동자들의 임금인상운동이 실패하자 인민헌장이 받아들여질 때까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고, 파업을 주도했던 노동자들의 지원 등이 계기가 되어 만들어진 것이다.6) 이런 점을 반영하여 G,D,H 콜은 “노동조합 활동은 선거법 개정 투쟁 국면과는 무관하게 1830년경 활발히 펼쳐졌고, 1834년까지 세력을 늘리면서 계속 성장했다. 그리고 이 단계에서 노동조합과 협동조합 운동은 대단히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어느 하나에 영향을 준 정치 문제가 다른 하나에 영향을 안 줄 수는 없었다.”7)고 서술하였고, 또 “노동조합과 협동조합 운동의 역사에서 중대한 이 시기에 둘은 따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얽혀 있었다.”8)라고 주장하고 있다. 말하자면 자유경쟁 자본주의에 대항하여 생존을 위해 투쟁하는 노동자 운동의 진행속에서 협동조합 문화, 기본적인 철학, 원칙적인 내용들이 자연스럽게 형성되고 있었다.

사회주의 사상도 자유경쟁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사상으로서 자연스럽게 나타났다. 당시 사회주의는 자유경쟁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폐해를 ‘경쟁’에 있다고 봤으며, 이에 따라 기본적인 의미를 개인주의 반대에 두고 있었다.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대안을 개인 간의 경쟁을 없애고 우애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17세기 우애조합(Friendly Society)이 아주 자연스럽게 발생한 것처럼, 사회주의도 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프랑스의 경우 초기 사회주의자들은 전 인류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가르침을 설파하였으며, 갈등보다는 화해를, 대립보다는 조화를, 분열보다는 우애를 강조하였다. 참으로 그것은 인간성의 그 어떤 기본적인 열성도 무시하지 않고 그 어떤 사회계급도 희생시키려고 하지 않았던, 기본적으로 종합적인 교리였다.9) 초기 사회주의자들이 내세웠던 대안의 성격은 명확하다. 경쟁을 극복할 수 있는 생산조합의 사회였던 것이다.10) 예컨대 초기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에게 생산조합은 경쟁을 극복하는 사실상 유일한 대안이었고, 집단조직의 실제적 경험을 가지고 있던 노동자들에게 그것은 어렵지 않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11) 오웬이 주도했던 영국의 사회주의도 비슷하다. 이들은 공업과 농업에 종사하고 평등한 권리와 평등한 교육을 향유하는 이삼천명 정도로 이루어진 공동체 건설을 시도했다. 엥겔스는 이러한 당시 노동자들의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합쳤다 갈라졌다하는 이러한 다양한 노동자 분파들 -노동조합원들, 차티스트들,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들의 정신적 교양을 높이기 위해 자신들의 독자적 힘으로 학교와 독서실을 설립하였다. 모든 사회주의 단체들 그리고 거의 모든 차티스트 단체들은 각각 이러한 시설을 가지고 있고 개별 조합들도 마찬가지로 많은 시설을 가지고 있다.”1 2) 

 

2. 프랑스의 사회주의와 프루동의 협동조합

사회주의 사상은 프랑스의 경우 생시몽이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마르크스 엥겔스도 생시몽으로부터 많은 내용의 영감을 얻었다. 레세크 코와코프스키에 의하면 마르크스, 엥겔스가 생시몽의 사회주의로부터 영감을 얻거나 받아들인 내용은 모두 7개였다.13) 1) 역사의 규칙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 2) 사회주의를 향한 역사의 냉정한 행진, 3) 무질서한 경쟁이 유발한 황폐한 결과, 4) 국가의 경제 관리의 필요성, 5) 정치적 지배를 경제행정으로의 대체, 6) 사회진보의 도구로서의 과학, 7) 정치 경제 문제에 대한 국제주의적 해법과 같은 것이다. 반면 마르크스 엥겔스가 받아들이지 않고 비판적으로 본 것은 현존하는 국가가 사회주의적 개혁을 단행할 수 있다는 이념이었다. 아울러 생시몽이 주장했던 “계급간의 협력과 종교적 색채가 가미된 ‘산업질서’에 호소하는 면”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한편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 일을 배치하고 필요에 따라 배분한다는 공식’을 마르크스 엥겔스에게 전수한 사람은 생시몽의 제자라고 할 수 있는 루이블랑이었다.14)

프루동은 프랑스에서 초기 협동조합 운동의 사상가였다. 영국의 오웬과 함께 협동조합 운동창시자로 불린다. 빈센트(K. Vincent)라는 사람은 “프루동의 저서만이 아니라 [연구노트]까지 분석한 학위 논문에서 비록 당시의 사회적 배경이나 노동조합운동의 전개과정을 도외시하고 있긴 하지만, 1839~1847년 동안의 프루동의 이론을 ‘진보적 조합’으로 그리고 1848년 이후의 이론을 ‘상호부조 사회주의’및 연방제이론으로 파악하고 있다.”15) 프루동은 산업적인 여러 힘을 기능과 생산물의 결합에 따라 체계화시킨 것이 조합이라고 본다. “그것은 가장 필요한 제도인 동시에 구성하기가 어려운 제도이다. 조합이 결성되면 기존의 사회적 모순들이 극복되는 사회변형이 뒤따른다. 조합은 노동하는 장소이자 사회가 상호작용하는 장소이다.”16) 또한 조합의 주요 기능으로 “조화있게 생산하고 소비하는 인간”으로 보고, “조합원들은 생산자이자 소비자가 되며, 경영참여자가 되기도 하고 출자자가 되기도 한다. 조합원들은 동일한 작업만을 반복하지 않고 작업의 전 과정을 두루 익힌다.”고 판단했다. 프루동의 조합이론을 살펴 볼 때, 노동자들이 과도한 경쟁과 착취로부터 해방되어 그들 자신이 생산수단의 소유자가 되고, 생산의 결실을 전부 누리며, 직접 생산과정의 결정에도 참여하는 조합을 구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이들은 자본가 경영 및 경쟁적 시장경제가 정의와 평등에 지나치게 위배되기 때문에 그 대신에 조합을 결성하여 자유로운 협동원칙 아래 생산자 모두가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사회를 원하였던 것이다.17) 이러한 프루동의 사상은 1848년 혁명을 통해서 자극받은 것으로서 그는 “1848년 혁명이여 너의 이름은 무엇인가? 노동권이다. 너의 기치는 무엇인가? 생산자노동조합 ! ”이라고 외쳤다. 또한 프루동은 특히 프랑스의 경우 노동자가 협동조합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자금이 필요할 것으로 판단하고, 이를 지원하기 위한 ‘인민은행’의 창설도 주장하였다. 프루동이 말하는 인민은행은 “교환은행의 신용기능을 더욱 강화하여 노동자들에게 무이자 또는 저율의 신용을 제공하여 그들로 하여금 독립 소생산자가 되게 함으로써 그들을 임금제도로부터 해방시키고 나아가 기존의 사회질서를 변혁시켜 평등을 실현한다는 목표를 지니고 있다.”18) 인민은행을 통한 지원은 현재에 와서 살펴볼 때 협동조합 활동에 대한 금융적 지원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가 인민은행 논의를 제기한 것은 1848년 혁명이후 노동자에 대한 지원 금액이나 이자가 노동자 자립의 관점에서 상당히 미흡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프루동이 주장한 노동자에 대한 금융지원방안은 보수 세력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결론적으로 프루동은 자신의 가치를 ‘평등’에 두고, 평등이라는 가치는 기존의 자유경쟁 자본주의 생산관계에서는 실현할 수 없고, 협동조합의 생산관계에서 달성할 수 있다고 봤다. 프루동에게 협동조합은 모든 사람들이 소비와 생산과정에서 평등하게 참여하여 인간사회의 정의를 실현하려 한 조직인 것이다.

마르크스는 [철학의 빈곤]이라는 글과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이하 ‘비판 요강’)이라는 글에서 프루동에 대해 집중적으로 비판한다. ‘철학의 빈곤’에서는 주로 프루동의 철학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비판 요강’에서는 프루동의 경제학 이론에 대해 비판한다. 마르크스가 프루동의 저술에 대해 주목하고 비판을 집중한 이유는 대체로 당대의 노동자들이 많이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노동자들로부터 프루동의 영향력을 차단하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철학의 빈곤’에서 마르크스는 프루동의 중심의제가 ‘평등’이긴 하나, 1) 프루동의 ‘평등’이 필연이 아니라 섭리로서 주장되고 있으며, 2) 문제를 단순하게 좋은 측면과 나쁜 측면으로 나눠서 구별하는 비변증법적 사고라고 비판한다. 아울러 프루동은 3)자본주의사회의 적대적 측면을 보지 못하고, 계급간의 적대를 배제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외에도 4)정치운동과 사회운동의 분리, 5)시대가 갖는 특정한 구체적 조건의 역사성을 외면하고(비역사성), 6)헤겔의 변증법 철학에 대한 무지 등에 대해 집중 비판하고 있다.

‘비판 요강’에서 마르크스의 프루동에 대한 언급은 거의 대부분 ‘무지’나 ‘이해하지 못함’, 혹은 ‘혼동’ ‘어리석음’이라는 단어와 같이 사용한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프루동은 역사적 조건에 대한 이해결여, 가치가 노동으로부터 산출된다는 개념에 대한 무지,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에 대한 이해부족과 무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종합적 통일에 대한 이해부족, 자본주의 생산관계, 즉 자본-임노동관계에 대한 무지 등등을 지적하면서, 프루동에 대해 “종이 울리는 소리는 듣지만 어디에서 울리는지는 결코 알지 못하는 사람”19)이라고 비판한다.

이상에서와 같은 마르크스의 프루동 비판은 철학과 경제학에 집중되어 있다. 주의해야 할 점은 프루동의 협동조합에 대한 내용 자체에 대해선 일체의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마르크스가 주목한 것은 프루동의 협동조합이론이 아니었다. 당시 마르크스 엥겔스의 초점은 자본주의 사회의 분석과 함께 노동자 계급의 올바른 철학의 수립에 있었기 때문이다. 노동자 계급만이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새로운 사회를 구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마르크스는 프루동의 철학이 자본주의 결함들을 제거하기 위한 시도이기는 하나, 경제적 토대는 그대로 놔두면서 결함을 극복할 수 있다고 이해하는 비본질적, 비변증법적 사고의 측면에 대해 비판했던 것이다. 즉 마르크스는 프루동의 전반적인 논리가 계급 적대보다는 계급 화해적 측면이 있고, 계급 폐지를 통한 피억압계급의 해방을 강조한다. 이것은 당시 마르크스가 두가지 점에 염두하고 있었음을 입증한다. 1)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 2) 올바른 노동자 운동의 철학과 자본주의의 적대적 성격 등이다.

 

3. 로버트 오웬의 사회주의와 협동조합 운동

일부에서 로버트 오웬이 협동조합 운동의 창시자로 알고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앞에서 언급하였지만, ‘우애조합’ 등이 있었고, 울위치와 채텀의 조선소 노동자들이 협동조합을 결성하여 협동제분소를 운영한 것은 이미 알려진 내용이다. 로버트 오웬은 협동조합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사람이다.

로버트 오웬은 원래 공장경영자였다. 당시 영국을 휩쓸고 있던 산업혁명, 특히 리처드 아크라이트(Richard Arkwright)의 수력방적기를 이용하여 1799년~1829년 사이에 뉴라나크 공장에서 5%의 배당금을 지불한 후에도 30만 파운드의 순이익을 올렸다고 계산하였다.20) 오웬은 1815년 이렇게 말했다. “뉴라나크에 있는 내 공장에서는 2천여 명의 청소년들과 성인들이 기계의 동력과 운전을 감시한다. . . . 그들은 60년 전 같았으면 스코틀랜드 전체 인구의 노동력이 필요할 만한 일을 자기들 혼자서 해치운다.”21)

오웬은 사람들의 빈곤원인이 ‘경쟁’에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경쟁사회는 인간의 본성과 상반된 제도로서, 이를 대신하여 서로 돕는 ‘협동’을 사회의 근본원리로 삼아야한다고 주장했다. 누구든지 태어날 때는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으나, 경쟁사회라는 해악에 오염된 결과 노동자는 마치 태어날 때부터 못사는 사람인 것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오웬은 우선 노동자들이 좋은 환경에서 자라나야 한다고 판단했다. 당시 영국의 공장에서는 많은 아이들이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하고 있었다. 영국의 중심산업이었던 섬유산업(방적업)에서는 증기기관이나 수력을 이용한 방적기계가 발달하였고, 비약적인 생산력 증가가 있었지만, 이런 기계를 청소하고, 유지관리하기 위해서는 몸집이 작은 아이들이 안성맞춤이었으며, 무엇보다도 임금도 어른보다 싸게 줄 수 있었기 때문에 대개의 공장주는 아이들을 고용했다.22) 그러나 오웬은 아동노동에 단호히 반대하였다. 자신이 운영하는 공장 - 뉴라나크에서 노동시간을 10시간 반으로 단축했으며, 10살 미만의 어린아이를 고용하지 않았다. 나아가 공장노동자의 자녀들을 위한 유치원이나 학교를 개설하였다. 춤이나 독서, 산수, 지리 등을 아이들에게 가르쳤던 것이다. 오웬 자신은 정치를 혐오했으나, 의회의 조사위원회에 출석하여 증언하였고, 아동노동금지 법률제정에 최선을 다했다.

이외에도 오웬은 노동자들을 인간으로 대우하고, 그들의 노력을 평가하는 방식으로 경영을 했다. 노동자들도 노력한다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오웬의 철학이었다. 또한 오웬은 노동자에게도 생활과 노동의 윤리를 요구했다. 이를 위해 일부러 노동자 가정을 방문하고 점검도 하였다. 특히 오웬이 혐오했던 것은 노동자의 알코올 중독이었다. 뉴라나크 공장에서 술에 취해있는 모습이 적발되면 처음에는 벌금, 두 번째는 해고라는 징계를 부과했다. 오웬의 공장은 대우가 좋았기 때문에 누구도 해고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일시에 공장의 음주풍습이 사라졌다고 한다. 오웬도 경제불황으로 인하여 뉴라나크 공장이 조업정지 상태에 빠졌지만, 한사람의 노동자도 해고하지 않고 평상시와 같은 임금을 계속해서 지불하였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사람들에게 영향을 많이 준 오웬의 철학은 협동공동체의 건설이었다. 좋은 환경에서는 좋은 사람을 육성할 수 있고, 나쁜 환경에서는 나쁜 사람이 태어날 수 밖에 없다는 판단 하에, 오웬은 경쟁사회와는 완전히 다른 협동공동체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오웬은 협동 주택에서 거주하고, 협동해서 일하고, 협동으로 운영하는 이상적인 공동체를 전 세계로 확산시키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공동체 조성이 다양한 종교단체 등이 주도하여 세계 각지에서 나타나고 있지만, 미국에서 실패한 후에 실의에 빠져 귀국하여 다시한번 시도하였으나 영국에서 마저 실패를 하고 말았다. 오웬과 그의 추종자들이 시도한 공동체 건설운동은 생각할 수 없는 부산물을 오늘의 우리들에게 남겨 주었다. 바로 협동조합인 것이다.23)

오웬의 구상에 찬성하면서 오웬주의 공동체 건설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직면했던 문제는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한 거액의 자금이었다. 토지 취득이나, 협동생활을 할 수 있는 주택, 식당을 건설하기 위해서라도, 또 협동노동의 현장인 공장을 만들기 위해서도, 상당한 자금을 갖고 있어야 했으며, 이것을 언제까지나 모금에 의존할 수는 없었다. 오웬주의자들이 생각했던 것은 우선 공동체 건설의 출발점으로서 모두가 이용할 수 있는 협동매장을 개설하여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판매하면서 자금을 조금씩 저축하여 조달한다는 단계적 전략이었다. 만일 자금을 충분히 모을 수 있다면 주택을 건설하고, 그 다음에는 공장을 건설하며, 마지막에는 토지를 구입해서 농장을 경작한다는 단계적 구상을 했던 것이다.24)

로버트 오웬 스스로는 이러한 전략에 대해 그다지 찬성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는 자본가들의 기부에 의존했다. 자신들의 계획을 이해만 할 수 있다면 부유한 사람들도 찬성할 것이고, 기쁜 마음으로 자금을 내줄 것으로 생각한 것이 바로 오웬이었다. 그러나 오웬을 따랐던 오웬주의자들은 오웬의 생각과는 반대로 스스로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사실상 오웬의 협동조합은 오웬주의자들의 협동조합이었던 셈이다. 이런 이유로 1830년대 오웬주의자들은 영국 전역에 200개가 넘는 점포, 즉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생협매장을 개설하였다. 보수적인 평가에서도 오웬주의 협동조합은 1820년대와 30년대에 500여 곳에 2만명 가량의 회원이 가입하고 있었다.25) 우리는 이것을 오웬주의 초기 협동조합운동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즉 오늘날 협동조합의 뿌리인 초기협동조합은 생활의 모든 측면에서 협동하고 생활하는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한 첫걸음으로서 탄생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원대한 구상 속에 시작한 초기 협동조합운동은 1830년대 말이 되면서 거의 모든 매장이 폐쇄되기에 이른다.

엥겔스는 오웬에 대해 여러차례 언급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잉글랜드의 사회주의자들은, 공업과 농업에 종사하고 평등한 권리와 평등한 교육을 향유하는 이삼천명 정도로 이루어진 홈 콜로니에서 재산의 공유제를 점차적으로 도입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이혼을 용이하게 할 것, 완전한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는 이성적 정부를 수립할 것, 형벌을 폐지하고 그 대신에 범인을 이성적으로 대우할 것) 이것들이 그들의 실천적 제안들이다. 이 사회주의는 공장주인 오웬으로부터 유래한다. 따라서 이 사회주의는 사실상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의 대립을 뛰어넘어 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형식에 있어서는 부르주아지에 대해서 매우 관대하고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해서는 매우 불공평하다. 이 사회주의자들은 대단히 온건하고 평화적이다. . . . 중략 . . . 게다가 이 사회주의자들은 하층 계급의 타락을 항상 한탄하면서도 사회적 질서의 이러한 해체 속에 있는 진보적 요소들을 보지 못하며, 또한 유산계급사이에서 보여지는 사리와 위선의 타락이 훨씬 악질적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이 사회주의자들은 역사적 발전을 조금도 인정하지 않는다.26)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엥겔스는 오웬의 사회주의가 평등을 주장하고 몇가지 진보적인 요소를 담고 있지만, 정작 노동자 계급에 대해서는 진보적 요소들을 보지 못하며, 불공평하게 다루고 있음을 주장한다. 그리하여 엥겔스는 당시 노동자 계급내의 두가지 분파라 할 수 있는 차티스트와 사회주의 두 세력중에서 차티스트의 의미를 훨씬 더 강조한다. 여기서 분명하게 엥겔스의 시각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엥겔스는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오웬주의자들이 추진했던 협동조합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오웬주의를 단순하게 사회주의로서만 판단하고 있다. 다음의 서술이 이를 입증한다.

이처럼 노동자 운동이 두 개의 분파, 즉 차티스트들과 사회주의자들로 갈라져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되었다. 차티스트들은 가장 뒤처져 있고 가장 발전하지 못했으나 그대신 그들은 진정한 살아있는 프롤레타리아들이며, 프롤레타리아트의 대표자들이다. 사회주의자들은 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고 빈궁에 맞서는 실제적 수단을 제시하고 있으나 본래 부르주아지 출신들이고 이 때문에 노동자 계급과 융합할 수 없다.27)

 

4. 로치데일 공정선구자 협동조합의 의미와 평가28)

'선구자 조합'은 노동자운동의 파업투쟁이 계기가 돼서 만들어졌다. 파업투쟁에는 늘 ‘노동자 대표’가 있어야 하며, 대체로 이들은 파업투쟁 이후 구속이 되거나 취업이 어려워 생계의 곤란을 겪는 경우가 많았다. 조지 제이콥은 선구자 조합의 기원이 파업투쟁이었고, 파업투쟁을 주도했던 노동자대표들이 공장주들의 취업불가 조치 등으로 인한 실직 상태가 기원이었음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29) 말하자면 협동조합은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으로 인한 자구책이었던 것이다. 당시 노동운동을 주도했던 사람들은 앞에서도 언급한 차티스트였는데, 차티스트들은 대개 투쟁중심의 사고를 갖고 있었다. 이들은 모든 걸 파업투쟁에 집중하다보니, 다른 활동들에 대해선 평가절하 하는 경우도 많았을 것이라 판단된다. 협동조합은 일종의 생활대책이라 할 수 있다. 예컨대 투쟁을 하는 사람도 필요하지만, 협동조합을 통해 조합원의 생활개선을 시도하는 사람도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 차티스트운동을 주도했던 노동자들은 협동조합 운동하는 사람들을 비난하였다.30)

협동조합 운동가들은 ‘자조론’을 내세우면서 활동에 임하였다.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생활을 스스로 책임지겠다는 자세였다. 이것은 예컨대 일본의 아베정부가 의료보험 개혁을 주장하면서 건강에 대한 자기책임론을 제기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협동조합 운동가들이 내세웠던 ‘자조론’은 불평등의 모든 책임이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 아니라, 불평등을 개선해 나가는 과정에서 노동자들 스스로의 힘으로, 주체적인 역량으로 상황을 타개하겠다는 주체성의 발로였다. 불평등이라는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있는 주체는 노동자밖에 없으며, 이러한 노동자운동을 탄압하고 방해하는 자본 세력에 맞서 그들의 동정심이나 자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생활을 해결하겠다는 점에 비중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주체적 역량의 강화는 핵심철학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입증하는 것이 선구자 조합의 교육중시 원칙이라 할 것이다. 당시의 법률이 노동자가 무식하다는 이유로 참정권을 인정하지 않고, 조합의 조합원 교육사업도 금지하고 있었으나 선구자 조합은 이를 포기하지 않았다.31)

오늘날 협동조합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선구자 조합’을 최초로 성공한 조합으로 인식한다. ‘선구자 조합’이 성공한 이유는 무엇인가가 당연히 중요할 수밖에 없다. 운동의 방향성에서 선구자 조합이 처음부터 지향했던 방향과 초기협동조합운동을 비교하면 거의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사업의 영역에서, 말하자면 매장의 경영에 대해 선구자 조합은 초기협동조합운동의 실패를 교훈삼아 보다 세련된 방법과 규율에 입각해서 실무에 적용했던 것이다.32) 가장 결정적인 시도로써 조지 제이콥은 외상거래 중단과 현금거래 원칙을 우선 제시한다. 이것은 G.D.H. 콜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많은 협동조합은 경기가 나쁠 때 외상 판매를 하기도 했는데, 그 때문에 돌려받을 길 없는 부채를 떠안아 어려움을 겪었다.33) 이를 누구보다 분명히 인식했던 선구자 조합은 조합원에게 물건을 판매할 때도, 물건을 구입할 때도 일체의 외상거래를 허용하지 않고, 현금거래 원칙을 철저하게 엄수한 것이다. 완벽한 무차입 경영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이 외에도 사업의 내용이나 조합의 운영에 대하여 몇 개의 원칙을 정하고, 원칙에 근거하여 조합을 꾸려나갔다. “그들에게 첫째는 원칙이었다. 이윤은 둘째였다. 원칙이야말로 명예로운 이윤의 기반이자 정직한 이윤의 원천이라고 믿었다.”34) 선구자 조합의 원칙은 바로 성공이유 자체인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선구자 조합의 원칙이 과연 무엇인지 논의하였다. 이것을‘로치데일 원칙’으로 부른다. 선구자 조합이 채택한 원칙은 오늘날 전세계 협동조합이 본받아야 할 공통된 내용으로 보고 협동조합 원칙으로 계승하고 있다.

그렇다면 ‘로치데일 원칙’이란 무엇인가? 로치데일 원칙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선 사람들 마다 의견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들어 조지 제이콥은 14가지를 제시하고 있다.35) G.D.H. 콜은 8가지를 제시한다.36)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핵심적인 내용은 대체로 일치한다. 필자는 현재 일본에서 9가지로 정리한 의견에 동의한다.

1) 민주주의 원칙(일인 일표)

2) 조합원 개방제도 원칙(가입 탈퇴의 자유)

3) 출자에 대한 이자제한 원칙

4) 이용 실적에 비례한 배당 원칙

5) 시가판매 원칙

6) 현금 거래 원칙

7) 공정한 품질, 정확한 계량 원칙

8) 교육중시 원칙

9) 정치적 · 종교적 중립 원칙37)

위의 9개 원칙 각각에 대해서도 관점에 따라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 다를 수 있다. 당시의 상황에서 가장 중요했던 원칙은 외상거래를 중지한 원칙이고, 또 상인을 배려했던 시가판매의 원칙이었다. 그리고 필자가 판단할 때 선구자 조합이 노동자들에게 뿌리내린 중요한 원칙으로서 이용실적에 비례한 배당원칙과 교육 중시 원칙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당시 노동자들에게는 저축이라는 개념이 전혀 없었다. 저임금으로 일하는 그들의 유일한 즐거움은 술이었다. 술을 마시는 것만이 우울함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었고, 조금이라도 돈이 있다면 바로 술을 소비하는 것이 당시 노동자들의 생활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합이 다소 할인을 한다고 해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선구자조합은 과감히 조합원에게는 시가로 현금거래를 하고 다른 상점에서는 이윤에 해당하는 몫을 조합에서 관리하여 3개월 후에 정리해서 조합원에게 돌려주었던 것이다. ‘이용실적에 비례한 배당’이었다. 이렇게 하면 노동자가 그때까지 볼수 없었던 금액이 그들의 계좌에 쌓였던 것이다. 조합원은 생활에 여유가 생기면 바로 계좌에 저축을 하는 습관도 생기고, 저축한 돈이 필요할 경우 필요한 만큼의 현금을 인출할 수 있었다. 조지 제이콥은 당시의 노동자들이 이것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잘 보여준다.

조합을 마뜩잖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조합에 50파운드를 예금하고 있는 한 부인에게 “조합이 망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녀는 “망해도 상관없어요. 나는 지금까지 1실링밖에 내지 않았는데 지금은 50파운드나 예금하고 있거든요. 만일 망하더라도 어쩔 수 없겠지요.”라고 답했다. 이런 일화는 드물지 않다. . . . 중략 . . . “괜찮아요. 조합이 망해서 내 돈이 전부 사라진다 해도 좋아요. 조합은 내가 그동안 낸 것 이상을 나에게 주었기 때문이죠.”38)

교육 중시 원칙에 대해선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1854년 연감에도 대영제국에서 이제껏 볼 수 없었던 경제적인 공지를 담았다. 바로 여러 종류의 간행물(일간지, 주간지, 계간지 등)을 당시로서는 꽤 풍부하게 갖춘 열람실을 아침 9시부터 밤 9시까지 월 2펜스만 내고, 누구나 이용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 열람실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일요일에도 평일과 같이 문을 열었다. . . .중략 . . . 이렇게 협동조합에서 제공하는 정보는 노동계급이 가장 저렴하고 쉽게 이용할 수 있는 것이었고, 영국 신사들이 보통 얻을 수있는 정보보다 질이 높았다. . . .중략 . . . 협동조합 사람들은 그들이 만든 돈으로 책을 사고, 신문열람실과 도서실을 만들고, 관리도 스스로 했다. 만일 이것이 없었다면 그들은 보다 자유롭고 용기있는 태도를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았기에 협동조합 사람들은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어느 곳으로부터도 통제를 받지 않았다. . . . 중략 . . . 지금은 신문열람실과 도서실 모두 무료로 개방된 것이다.39)

이제 협동조합은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조직력과 자금, 이익을 남기지만 자본주의 착취를 배제하는 실제적인 조직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미주 

1) 6개조는 다음과 같다. 1) 건전한 상식을 가지고 있고 전과가 없는 모든 성년 남자의 보통 선거권, 2) 매년 소집되는 의회, 3) 무산자도 입후보할 수 있도록 의원에게 세비를 지급할 것, 4) 부르주아지에 의한 매수와 협박을 방지하기 위한 무기명 투표에 의한 선거, 5) 공평한 대표권을 확보하기 위한 평등한 선거구, 6) 피선거권의 자격을 토지 소유 수입이 300스털링을 얻는 자에 한정한다는 규정을 폐지하고 유권자면 누구나 피선거권도 가지게 할 것. 이상 엥겔스, ‘잉글랜드 노동 계급의 처지’ [칼 맑스 프리드리이 엥겔스 저작선집-1], 김세균 감수, 박종철출판사, 2004년 초판7쇄 171페이지

2) 단결금지법은 1824년에 폐지되었다. 

3) [로치데일공정선구자조합], 조지제이콥홀리요크 지음, 정광민 옮김, 그물코, 2014년 6월 초판 2쇄, 225페이지 

4)  [세계노동운동사 1], 김금수 지음, 후마니타스(주), 2013년 1월 1판1쇄, 154페이지

5)  [영국협동조합의 한세기], G,D,H 콜 지음, 정광민 옮김, 그물코, 2015년 12월 초판 1쇄. 126페이지

6)  [로치데일공정선구자조합], 31페이지 

7)  [영국협동조합의 한세기], G,D,H 콜 지음, 정광민 옮김, 그물코, 2015년 12월 초판 1쇄. 68페이지

8)  위의 책, 69페이지

9)  [프랑스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서울대 프랑스사 연구회 편, 느티나무, 1989년 1월초판 27페이지

10)  위의 책, 32페이지

11)  위의 책, 38페이지

12)  위의 책, 181페이지

13)  [마르크스주의의 주요흐름-1], 레세크 코와코프스키 지음, 변상출 옮김, 유로, 2007년 초판1쇄, 303페이지

14)  위의 책, 303페이지

15)  [프랑스노동운동과 사회주의], 69페이지

16)  위의 책, 71페이지

17)  위의 책 74페이지

18)  위의 책 94페이지

19)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2], 마르크스 지음, 김호균 옮김, 그린비, 2007년 초판 2쇄, 38페이지

20)  [옥스퍼드 영국사], 케네스 모건 엮음, 한울아카데미, 2009년 초판 5쇄, 489페이지

21)  [민중의 세계사], 크리스 하먼 지음, 천경록 옮김, 책갈피, 2005년 초판 3쇄, 412페이지

22)  [協同組合を 学ぶ], 全労済協会監修, 中川 雄一郎, 杉本 貴志編集, 日本経済評論社, 2012년 13페이지

23)  위의 책, 14페이지

24)  위의 책, 15~16페이지

25)  [옥스퍼드 유럽 현대사], 팀 블래닝 엮음, 김덕호 이영석 옮김, 한울아카데미, 2003년 10월 초판, 158페이지

26)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1],  180페이지.

27)  위의 책, 181페이지

28)  한국에서는 ‘로치데일공정선구자조합’ 혹은 ‘로치데일공정개척자조합’을 혼용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여기서는 ‘선구자 조합’으로 부른다. 

29)  [로치데일공정선구자조합], 26~31페이지

30)  위의 책, 184페이지

31)  위의 책, 169페이지

32)  [協同組合を 学ぶ], 17페이지.

33)  [영국협동조합의 한세기], 37페이지

34)  [로치데일공정선구자조합], 381페이지.

35)  1. 출자금으로만 매장을 시작, 2. 가장 순정한 식료품, 3. 물품의 양이나 무게를 속이지 않는다. 4. 시가판매(기존 상인에 대한 배려), 5. 외상금지, 6. 이용액에 비례한 배당, 7. 이윤의 저축, 8. 출자금에 대한 이자는 고정 5%, 9. 생산자 협동조합은 임금에 비례한 이윤 배당, 10. 이윤의 2.5%를 교육에 사용, 11. 민주적 투표권(1인1표), 12. 범죄와 경쟁이 없는 산업도시 건설, 13. 도매구매조합, 14. 자조의 정신, 이상 위의 책, 326페이지.

36)  1) 민주주의 원칙(일인 일표), 2) 개방의 원칙, 3) 이자의 제한, 4) 잉여금 배분, 5) 현금거래, 외상금지, 6) 순정물품 판매, 7) 이익금의 적립, 8) 정치적 종교적 중립, 이상 [영국협동조합의 한세기], 134페이지

37)  [協同組合を 学ぶ], 19페이지.

38)  [로치데일공정선구자조합], 100페이지

39)  위의 책, 288~289페이지

박찬호 bluepol620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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