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포기할 수 없다. 기지가 없어지는 그날까지

기사승인 2017.06.29  13:43:32

공유
default_news_ad1

- 제40차 헤노코(辺野古)지원 연대행동

원문 ; 이츠데모 겡키 7월호 4페이지~7페이지(글 이구치 세이지(井口誠二), 사진 모리즈미 다카시(森住卓)

 

“자, 이제 일어나 주십시오.” 정중한 말투 한편에 고압적인 톤으로 기동대원이 이야기한다. 나하(那覇)시에서 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나고(名護)시 헤노코. 캠프 슈와브(Camp Schwab) 게이트 앞에서 공사 차량을 통행하지 못하도록 앉아있던 사람들에게 기동대가 주위를 둘러싸고 한사람씩 들어 올려 이동시킨다. “이 집회는 정당한 항의 활동입니다.”라고 소리를 질러도 기동대원은 전혀 개의치 않고 눈을 맞추지도 않는다.

길 반대편에서 마이크를 이용해 항의 시위하고 있던 오키나와 민의련의 세나카 가즈오(瀨長和男)씨도 “해산하라는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면서 연행당하고, 연좌 농성에 참여했던 다른 사람과 함께 기동대에게 양팔을 붙들려 i겨났다.

▲ 농성자들을 강제로 끌어내는 일본기동대

“이곳이 정말 일본이란 말인가?” 참가자들이 놀랜다. 오사카의 다쯔미 노리코(辰巳德子)씨(사무직)는 “주변에 계시던 분들이 차례차례 기동대원에게 끌려가는 것이 정말 무서웠다. 필사적인 외침도 들리지 않았다. 이런 행태가 매일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정말 슬펐다.”고 이야기했다.

왜 연대 행동을 시작했는가?

1995년 9월,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병사 3명이 12세의 소녀를 강간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전후 줄곧 미군들의 횡포를 감내해 왔던 현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다음달 현민 총궐기 대회에는 8만 5천명이 참가하였으며, 그후 미군 기지 철수운동으로 발전했다. 당황한 미 · 일 두 정부는 96년 후텐마(普天間) 기지 반환 등을 포함하는 SACO(오키나와 미일 특별실행위원회)합의를 정리했다. 그러나 합의 내용은 후텐마 기지 철수가 아닌 현내 다른 지역으로의 이전이었다. 이전 예정지였던 헤노코에서는 97년에 반대하는 주민들이 연좌 농성을 시작했으며, 오키나와 민의련도 참가했다. 전일본 민의련은 참여를 호소하면서 지원해왔다.

▲ 후텐마기지와 오스프리

당시 전일본민의련 사무국장으로 근무했던 나가세 후미오(長瀨文雄 현 부회장)는 “당초, 연대 행동은 한번 예정으로만 생각했으며, 지속하겠다는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오키나와의 문제로만 생각해도 될 것인가라는 문제 의식을 늘 갖고 있었다. 우선 현지에 가보자고 논의를 한 후에 2004년 실행을 결정했다.”

이렇게 시작한 연대 행동이 지금까지 지속된 이유는 무엇인가?

연좌 농성 천막에는 오키나와 전쟁을 알려주고 싶다는 할머니를 비롯해,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다. 처음에는 “알수없는 사람들이 왔다.”고 의심쩍은 표정을 드러냈지만, “몇년 동안이나 연좌 농성을 지속 하는데도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와 준 것은 당신들이 처음이다.”라고 웃으면서 이야기를 한다.

“그날 밤 보고 대회에서는 참가자 모두가 오키나와 현실에 충격을 받았다. 이렇게 끝날 수는 없다. 계속해서 진행하자라는 목소리가 더 커졌다.”고 나가세씨는 회상했다.

그 후 연대 행동 참여를 독려하면서 대형 버스 1대 분의 정원(55명)은 즉각 만원이 되곤 했다. 현장의 농성 유지나 참가 비용 등 장애는 결코 적지 않았다. 그러나 법인이나 사업소는 청년 직원을 적극적으로 보내주었다.

‘기지가 있는 동네’의 현실을 눈으로 확인한 직원들은 크게 변했다. 오카야마의 고안간잔(後安元三)씨는 “연대 행동에 참여한 직원이 실행위원회를 만들고, 영화 ‘표적이 된 마을’의 상영회를 오카야마에서 개최했다.”고 알려주었다.

나가세씨는 “일상의 직장에서 ‘평화’를 실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오키나와에 가면 전쟁의 그림자를 실감나게 느낄 수 있다. 평화 학습으로는 이것만큼 좋은 경험은 없다.”고 이야기 한다.

왜 오키나와 주민들은 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것인가. 그것은 오키나와 전쟁과 전후 기지 피해를 체험했다거나, 아주 가까운 사람들에 보고 들었기 때문이다.

1945년의 오키나와 전쟁. 본토 결전의 시간이 임박했기 때문에 ‘사석’ 취급을 받은 오키나와에서는 주민을 포함한 처참한 전투가 계속 발생해 지역 주민의 4명 중 1명이 사망했다. 일본군으로 인한 희생자도 많았기 때문에, 군대는 결코 주민을 지켜주지 않는다고 배웠다.

전후에는 미국에 의한 피해가 끊이지 않았다. 미군이나 군속 등에 의한 중대 범죄는 오키나와가 일본으로 복귀한 1972년부터 5,919건이 발생했으며, 그중 살인 · 강도 · 강간 등의 흉악 범죄가 576건. 작년 4월에도 전 해병대원에 의한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미군기는 비행금지협정이 적용된 야간에도 평상시처럼 날고, 포음으로 수업은 여러번 중단된다. 작년 12월에 나고시의 얕은 여울(淺瀨)에 추락한 최신 수송기 ‘오스프리’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비행중에 있다.

일본 헌법 제13조는 “모든 국민은 개인으로서 존중받는다.”고 규정하고 있으나, 오키나와에서는 인권은 물론 생명조차 경시하고 있다. “모든 국민은”이라는 규정에 오키나와는 포함되지 않는 것인가.

전국 언론에서는 이러한 오키나와의 현실을 보도하지 않는다. 일부 언론이나 인터넷은 ‘기지 반대 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은 본토의 활동가’라면서 의도적으로 왜곡된 정보를 흘린다. 본토에서 ‘보통’으로 생활하는 사람이라면 오키나와의 문제에는 신경쓰지 않는다. “바로 이 점이야 말로 정부가 의도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오키나와 민의련의 세나카(瀨長)씨. 정부에게 불리한 여론은 조성하지 않는 것이다.

현지 가이드의 역할을 맡고 있는 세나카(瀨長)씨는 “본인이 알고 있는 오키나와에 대한 지식과 현지에서 보고 들은 실상과의 차이를 느끼고, 그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달라. 보다 깊어진 지식에 경험을 더해 돌아가 주신다면 좋겠다.”고 참가자들에 대한 기대를 이야기했다.

이번의 연대 행동은 간부 직원을 중심으로 참가를 독려하여 23개 지역 연합에서 53명이 모였다. 참가자는 헤노코 외에 후텐마 기지나 전쟁 당시 부상병이나 주민들을 치료하는 자연 동굴이었던 아부치라가마 등을 둘러봤다. 이번에는 처음으로 캠프 슈와브(Camp Schwab)게이트 앞의 차량 출입구에서도 연좌 농성을 했다. 다만 심신을 고려하여 자발적 참여로 했다. 대체로 30%가 연좌 농성에 참여하였고, 남은 참가자는 길 반대편에서 나란히 기지 건설 반대 현수막을 내걸고 지원했다.

스마트폰으로 촬영하고 있던 아오모리의 오사나이 아야나(長內彩菜)씨는 “연좌 농성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마이크에서 계속 주장했던 사람들도 구속된다. 여기서는 언론의 자유가 없다는 충격을 받았다. 동시에 연좌 농성을 하는 사람들의 단 1분1초라도 공사를 지연시키자는 생각이 가슴을 울렸다. 직장에 돌아가 영화를 보면서 주위 분들에게 알리고 싶다.”고 이야기를 했다. 행동 첫째 날 밤에 시행한 학습회에서는 헬리콥터의 기지 문제를 안고 있는 히가시손(東村)의 이사 마사쯔구(伊佐眞次) 기초 의회 의원이 와서 연좌 농성의 의미를 이야기 했다. “공사를 중단하는 것만이 아니라, 비폭력 행동으로 반대 의지를 드러내는 것도 큰 의미가 있다. 언론이나 다른 분들에게 알려주시는 것으로 여론이 조성된다. 여론이 확산되면 정치를 변화시킬 수 있고, 기지 건설을 중단시킬 수 있다.”

 

▲ 나고시장 이나미네 쓰스무

헤노코가 있는 나고시에서는 기지 건설 반대 입장을 갖고 있는 이나미네 쓰쓰무(稻嶺進)씨가 2010년, 2014년 연속해서 시장에 당선. 2014년 현지사 선거는 건설 반대 입장을 표명한 오나가 다케시(翁長雄志)씨가 당선되었다. 당시의 국정선거에서도 기지 찬성파는 모두 패배했다. 오키나와 민의는 분명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민의를 무시하고 신기지 건설을 추진했다. 4월25일, 처음으로 헤노코 연안부를 매립하는 호안(護岸) 공사에 착수했다. 대량으로 석재를 쏟아붓는 공사를 시행해서 현민에게 ‘자포자기’ 심정을 조성하려는 의도였다. 옹지사는 공사의 중단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할 방침으로 6월의 현의회에 필요한 의안을 제출할 예정이다(6월1일 제출). 기지 건설은 다시 중단될 수있는 것이다.

오스프리는 오키나와를 중심으로 전국 6개의 루트로 저공 비행 훈련을 계획하고 있으며, 수도권의 요코다(橫田)기지에도 10대를 배치할 예정이다. “헤노코는 오키나와의 문제”로 무관심했다면 일번 전역이 기지로 변한다. 농성 텐트의 한쪽 끝에는 “이기는 방법은 단념하지 않는 것”이라는 글씨가 적힌 간판이 세워져 있다. 현민은 이 말 대로 어떠한 권력의 횡포에도 굴하지 않고, 비폭력 투쟁을 계속해 왔다.

“지금까지 직원을 보낼 때 ‘어쨋든 잘 갔다와’라는 인사를 했지만, 이번에는 제가 오게 됐습니다. 여기서 배운 것을 잘 전달해서 착실하게 한사람씩 생각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연대하는 사람을 늘려나갈 생각입니다.”라고 오사카의 개호복지사 오카  유이치(岡雄一)씨가 다짐했다. 도쿠시마(德島)민의련 사무국장 난토 요시토모(楠藤義朝)씨는 “우리들의 운동이 오키나와 투쟁에 작은 도움이 된다고 듣고 힘을 얻었다. 한사람이라도 많은 사람에게 기지문제를 전달하고, 오키나와와 연대하는 운동을 만들어내고 싶다.”고 결의를 다졌다.

 

 

참고 ; 헤노코를 둘러싼 최근의 오키나와 주요 연표

1995년    9월 미군 소녀 폭행 사건
         10월 현민 총궐기 대회(8만5천명)

1996년   12월 SACO 합의(최종 보고서 정리)

1997년    1월 헤노코 연좌 농성 감시 행동 시작

2004년    8월 오키나와 국제대학에 미국 헬기가 추락함
         10월 제1차 헤노코 지원 · 연대 운동(민의련)

2009년    9월 후텐마 기지의 ‘현외 이전’을 공약한 하토야마(鳩山) 정권이 출범
         (그후 철회)

2010년    1월 나고시장 선거에서 이나미네 쓰스무(稻嶺進)가 처음 당선
          4월 후텐마 기지의 현외 이설을 촉구하는 현민 대회(9만명)

2012년    9월 오스프리 배치에 반대하는 현민 대회(10만명)
         10월 오스프리 후텐마 기지 배치
              오키나와 민의련 매주 수요일 아침 선전 운동 시작함

2013년    1월 오스프리 배치 반대를 담은 ‘건의서’를 총리에게 제출
             (현내 기초 단체장 · 기초 의회 의장이 서명)

2014년    1월 나고시장 선거에서 이나미네 쓰스무(稻嶺進)가 재선
          3월 오키나와 민의련 사무장 평화 가이드 양성 시작
          7월 헤노코 게이트 앞 24시간 연좌 농성 시작
         11월 오키나와 현지사 선거에서 오나가 다케시(翁長雄志)가
              처음으로 당선
(전 오키나와 헤노코 이설 반대 진영에서 출마함)

2015년    4월 오키나와 민의련 주2회 헤노코 지원 시작

2016년    4월 우르마시에서 전미해병 대원에 의한 강간 살인 사건 발생
         12월 오스프리가 나고시 인근 해안에 추락함

2017년    4월 헤노코 호안 공사 시작
          5월 민의련 제40차 헤노코 지원 · 연대 행동 

박찬호 기자 bluepol6204@hanmail.net

<저작권자 © 건강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