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건강연구소
바로 일주일 전, 이별을 통보했다는 이유로 스물 다섯살 여성이 동갑내기 남자친구에게 무참히 살해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찬란한 꿈으로 채워가던 한 사람의 일생이 그날에 멈춰섰다. 망자의 이름만 다를 뿐 본질은 달라지지 않은 이런 죽음들이 반복될 때, 우리는 이 죽음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
이 사건은 명백한 페미사이드(여성이라는 이유에 의한 살해)이다. 페미사이드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가 현재 또는 과거의 남편이나 애인같은 친밀한 파트너이거나 가족 구성원 혹은 서로 전혀 알지 못하던 관계더라도 범죄의 동기나 맥락이 불평등한 젠더 권력관계, 여성에 대한 남성의 통제나 소유 욕구 같은 젠더 구조와 관련되어 있을 경우에 발생한다. 2021년 기준 전세계적으로 고의로 살해된 여성과 여야는 81,100명. 그중 56%(반면 남성과 남아는 11%)가 친밀한 파트너나 다른 가족구성원에 의해 살해되었다. 여성들에게 집이 위험하다는 말은 이 때문이다.
친밀한 관계의 남성에게 살해된 여성통계를 집계하는 <한국여성의 전화>에 따르면, 남성이 여성을 살해하는 기본적인 이유는 “여성이 남성이 원하는 것을 하지 않아서” 이다. 이로 인해 2023년 언론에 보도된 여성살해 피해자만 최소 138명, 살인미수 311명이다. 정부의 공식통계가 없어 보도된 자료만 확인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 수치는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한다.
고소득 국가들만 비교하면, 한국은 평균 살인율은 낮지만 살인에 의한 여성 사망 수치는 높은 국가로 분류된다. OECD 국가 평균 여성의 살인사망사건 비율은 남성의 22% 수준이지만, 한국은 그 비율이 약 89%로 여성이 살인피해자가 되는 비율이 매우 높다. 한국 사회의 여성대상폭력을 심각하다고 응답하는 비율이 높아지고 있는 것은 단지 인식의 문제가 아닌 현실의 반영인 셈이다. 또한 미국을 제외한 한국, 일본, 그리고 유럽 국가들은 총기소지가 허용되지 않고 의료서비스가 발달하여 위험에 처한 피해자들을 살려낼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국가들에서도 여성들의 치명적인 피해가 줄지 않는 것은 친밀한 파트너라는 관계로 인해 여성들이 외부의 구조를 요청할 수 없는 사적 공간에서 저항할 수 없는 상태로 제압당하기 때문이다.
여성들을 살리기 위하여 국가와 이 사회는 무엇을 해야 할까.
첫째, 페미사이드를 예방하기 위한 유엔마약범죄국(UNODC)의 우선적 권고는 성별관련 살해(Gender-related homicide)를 다루는 데이터를 수집하라는 것이다. 폭력에 대한 공중보건적 개입은 문제의 정의와 위험요인과 보호요인의 판별에서 시작한다. 이런 기초 데이터를 토대로 폭력 피해 여성을 조기식별하고, 생존자를 지원하고 보호하며, 폭력을 인권과 사회정의의 문제로 다루는 정책으로 나아갈 수 있다.
페미사이드 통계가 없는 한국은 이번 사건도 교제폭력으로 기록할 것이다. 2022년 한 해만 7만 여건이 발생했고 살인과 살인미수 혐의 입건만도 95건이지만, 이 교제폭력을 파악하고 규제할 수 있는 법률은 아직 없다. 그간 국가별로도 페미사이드 적용 기준이 다양했는데, 2022년 3월 UN통계위원회는 페미사이드 판별기준을 포함하는 통계수집 프레임워크를 국제표준으로 최종승인했다. 지금까지 연구자들이 여성살해 범죄를 다른 살인과 구별하는 정보수집체계를 요구했지만 법무부는 도입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고수했었다. 작년 국정감사에서 통계청장이 밝힌 대로 신뢰할 수 있고 국제 비교가능한 관련통계 도입이 지체없이 추진되길 기대한다.
더 나아가 중첩적 취약성과 차별의 형태를 이해하는 교차 데이터를 통해 위험이 큰 피해자들을 보호하는 근거기반정책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은 개별 법률에 귀속할 수 없는 다양한 형태의 젠더폭력이 발생하는 현실적 상황을 반영하여, 친밀성이라는 관계적 속성과 사람중심관점의 보호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신뢰했던 파트너에게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가장 큰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위한 별도의 법적 보호를 제공하는 것은 국가의 책임이다.
둘째, 일주일 동안의 언론 보도에는 성별을 이유로 한 살인이라는 젠더 관점이 반영되었는가? 살인범과 사건의 전모에 대해 말해줄 중요한 증인이 희생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피해자의 서사는 가해자에 비해 가려지기 쉽다. 계획적이었으며 또한 전형적인 페미사이드라는 것이 초기부터 드러났는데, 가해자의 ‘명문대 의대생 프레이밍’이 줄곧 압도하고 있다. 앞서 한국 사회에서 목도했던 페미사이드 사건들에 의한 학습효과로 인해 여성들은 남성 가해자에게 ‘제공될 수 있는’ 언론과 형사사법체계의 우호적인 조치들을 우려했다.
언론은 어김없이 가해자를 위한 변명을 전달했고, 경찰은 피해자를 보호한다는 이유로 강력범죄 피의자에 대한 신상을 공개하지 않았다. 2차 가해를 우려한 피해자 가족들은 빈소도 없는 장례를 치렀다. 이 일련의 과정은 살인이라는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젠더폭력에 이르게 만든 성차별적 인식과 관행뿐만 아니라, 안타까운 희생자와 그 가족을 보호하는 데서도 실패한 우리 사회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작년 12월 이탈리아에서는 ‘자신보다 졸업을 먼저 한다’는 이유로 남자친구에게 살해당한 22세 ‘줄리아 체케틴’ 사건이 있었다. 전국적으로 대규모 시위와 추모집회가 열렸고, 체케틴의 장례식에는 1만 명의 시민과 법무부 장관이 참석했다. 교육부 장관은 체케틴 뿐 아니라 모든 학대받는 폭력피해자들을 기리는 묵념의 시간을 가지도록 이탈리아의 모든 학교에 요청했다.
한국 사회도 이번 사건을 또 다시 불운한 개인의 문제로 끝낼 것이 아니라, 젠더불평등 구조가 투영된 거대한 병리 현상으로 진단해야 한다. 짧은 생을 살고 떠난 피해자를 함께 애도하고 슬픔에 빠진 가족들을 위로하며, 폭력적 상황에 처해 있는 피해자들의 권리를 보장함으로써 더 이상의 비극을 막을 수 있는 성찰적인 변화를 만들어내야 한다.
셋째, 살인 미수 또는 여러 유형의 젠더폭력 피해자들을 위한 보건의료 최일선의 대응도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현재 한국의 의학 교육과 수련체계에서는 젠더폭력을 다루지 않기 때문에 의료적 개입이 어려운 실정이다. 외국의 연구에서도 의료진들이 여성대상폭력 피해자들에 대한 법의학적 간호지식이 부족하여 폭력피해의 증거를 훼손하거나, 폭력과 사고 피해자들을 충분히 조력하지 못한다는 보고가 있다.
국내 가정폭력 피해자들에 대한 조사에서는 구타와 학대에 의한 부상이라는 정확한 진단이 누락되어 적시에 필요한 치료가 이루어지지 못해 영구적인 장애가 남은 사례, 정신적 고통이 누적되어도 가정폭력이라는 직접 원인에 개입하지 못하여 다양한 불특정 원인으로 병원을 반복해서 방문하는 사례들이 적지 않았다. 따라서 젠더폭력 피해자들의 건강 문제를 파악하여 직간접적인 보건의료적 필요를 충족시키고, 이들의 건강을 옹호할 수 있는 보건학적 관점과 이에 기반한 적절한 개입이 이루어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피해자의 목소리를 듣고 공명하는 집단적이고 사회적인 해결의 힘이 강화되어야 한다. 현재 한국 사회는 각종 여성폭력관련 기본법들이 마련되어 있지만 기본법 취지를 무색하게 하는 조항들(가정폭력처벌 목적조항, 반의사불벌죄, 상담조건부 기소유예 등), 그것을 개선하지 않는 ‘가짜 정책’의 통치, ‘여성가족부 폐지’로 상징되는 사회정책으로서의 성평등 개선에 대한 집요한 무력화, 게다가 ‘여성에 대한 구조적 차별은 없다’ 고 말하며 젠더폭력에 대한 정책이 부재한 윤석열 정부라는 매우 유해한 조합에 놓여있다. 하지만 사람들의 생각과 규범을 바꾸고 성평등 달성을 위한 법제도를 요구하며 구조로서 젠더폭력에 개입하는 시민들의 협력 없이는 또 다른 페미사이드는 피할 수 없다.
아울러 평범한 일상에서 같은 피해자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여성들이 느끼는 분노와 슬픔, 그 너머의 고통과 절망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다시 묻는다. 멕시코 페미니스트 마르셀라 라가드(Marcela Lagarde)는 국가가 여성의 생명을 보호하지 못하는 것은 여성에 대한 폭력을 강화하고 정상화하는데 연루되는 것이라고 지적하며, 페미사이드는 바로 국가의 범죄라고 일갈한 바 있다.
이 국가가 반복되는 ‘사회적 고통‘에 공모하는 것이 아니라 해결하려는 책무를 감당하고자 한다면 조속히 페미사이드를 범죄로 규정하고, 여성에 대한 폭력을 종식시킬 수 있는 국가행동계획을 수립할 것을 촉구한다.
* 이 글은 프레시안, 라포르시안과 공동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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