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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disorder)에서 부조화(incongruence)로

기사승인 2019.01.28  22:4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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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소수자 정신과 진료에 있어 성별정체성 진단 기준 개정의 의미

성별정체성 진단기준 개정에 따른 정신과 진료 상담심리 영역의 변화


                                     살림의원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장창현

* 이 글은 '2019년 성소수자 인권포럼'에서 발표한 내용입니다.

세계보건기구(World Health Organization, WHO)는 지난 2018년 6월 18일 국제질병분류 제11판(11th edition of the International Classification of Diseases and Related Health Problems(ICD-11))의 초안(version for preparation)을 발표하였습니다.

성소수자 인권의 차원에서 주목할 점은 트랜스젠더(Transgender)를 정신질환(Mental and Behavioral Disorders) 챕터(Chapter)가 아닌 ‘성적 건강 관련 상태(Conditions related to sexual health)’ 챕터의 ‘성별불일치(Gender incongruence)’ 로 새로이 분류했다는 점입니다1).

ICD-11의 구 버전인 국제질병분류 제10판(ICD-10)에서는 트랜스젠더가 성주체성장애(Gender identity disorder) 서브그룹(Subgroup) 내의 성전환증(Transsexualism)으로 분류가 되어 있습니다. 이는 과연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요? 이러한 성주체성과 관련한 진단의 변화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ICD란 무엇이고 이것의 실제적 역할과 무게감은 어떤 것인지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ICD는 International Classification of Diseases and Related Health Problems의 약어이며 ‘국제 질병 및 건강문제 분류’로 번역됩니다. ICD는 전 세계적으로 건강 추세와 통계를 확인하기 위한 기초가 되며 질병과 건강 상태를 보고하는 국제 표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임상 진료와 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진단 분류의 표준이 되기도 합니다. 즉, ICD는 질병, 장애, 손상 및 기타의 건강 상태를 정의하는 기본적인 언어입니다. 또한 전 세계 WHO 회원국의 건강, 질병 통계를 ICD에 근거하여 산출합니다. 때문에 대다수의 WHO 회원국은 자국의 질병 진단 체계에 의무적으로 ICD를 차용합니다.

첫 번째 ICD는 국제 사인 분류(International List of Causes of Death)였으며 국제통계기구(International Statistical Institute)에 의해 1893년 처음 채택이 되었습니다. 1948년 출판 된 ICD 6판부터 세계보건기구(World Health Organization, WHO)가 관여하기 시작했습니다. 1967년부터는 WHO 회원국들은 질병과 사망 통계에 있어서 최신의 ICD 개정판을 사용하도록 규정됩니다. 우리나라도 이에 따라 1968년에 ICD-8에 따른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Korean Standard Classification of Diseases, KCD)가 최초로 만들어져 1973년부터 사용되었습니다. 1992년 발간된 ICD-10은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에 1995년부터 적용됩니다2).

ICD-11의 초안(version for preparation)은 이미 2018년 6월 18일에 승인이 되었습니다. 현재 인터넷에서도 ICD-11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ICD-11은 2019년 5월에 열리는 72차 세계보건총회(World Health Assembly)에서 공식적으로 공표되고, 2022년 1월부터 회원국에 효력이 생길 예정입니다. 이를 토대로 회원국인 우리나라 또한 KCD개정을 위한 ICD-11의 사용 방안에 대해 공론의 장이 열릴 것이며, 번역을 준비하고, 이에 따른 보건의료인력 교육이 이루어 지게 될 것입니다. WHO의 가이드라인에 맞춰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를 제·개정하는 통계청은 ICD-11의 반영은 2025년에야 이루어질 것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3).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KCD)는 ICD를 바탕으로 만들어집니다. 대한민국에서 의료기관이 환자를 진료하고 요양급여를 청구하기 위해서는 각 환자의 상병(병명)에 따른 질병코드를 입력해야 합니다. 환자에게 약이나 치료를 제공하기 위해서 KCD의 진단명을 사용한다는 말이지요. 그 뿐만 아니라 진단서와 같은 서류를 발급하기 위해서도 KCD의 진단명을 활용하여야 합니다. 정신건강의학과 진료 시에는 KCD에 근거한 환자 상태의 평가가 의무적입니다.

ICD의 변화는 한국의 의료계에 있어 진단과 소통의 도구의 개정이라는 큰 의미를 갖습니다.  ICD-10에서 성주체성장애(Gender identity disorder)의 대표적 진단인 성전환증(Transsexualism)은 ‘자신의 해부학적 성(anatomical sex)에 대한 불편함과 부적절감을 갖고 있으면서, 자신과 반대되는 성(opposite sex)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망, 그리고 자기의 몸을 자신이 선호하는 이성의 몸에 가능한 일치되도록 호르몬 치료와 수술을 받고자 하는 욕구’로 설명됩니다. 진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전환된 성주체성이 최소 2년 이상 지속되어야 하고, 다른 정신질환의 증상이나 신체질환과 연관되지 않아야 합니다4). 

ICD-10에서의 성전환증은 ICD-11에서 ‘성적 건강 관련 상태(Conditions related to sexual health)’ 챕터의 ‘성별불일치(Gender incongruence)’ 로 새로이 분류됩니다. 성별불일치는 자신에게 부여된 성(assigned sex)과 경험되는 성(experienced gender) 사이에서의 현저하고 지속적인 불일치감을 특징으로 합니다. 진단을 위한 기간은 수 개월(several months)로 다소 줄어들었습니다. 정신질환(Mental and Behavioral Disorders) 챕터를 벗어나 ‘성적 건강 관련 상태(Conditions related to sexual health)’ 챕터로 편입된 이유에 대해 WHO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첫 번째 이유는 성별불일치가 정신질환과 관련된 상태가 아니라는 과학적 근거가 점차적으로 쌓여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정신질환의 진단 및 통계편람 제4판(4th Edition of 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 DSM-4)의 성주체성장애(Gender identity disorder)에서 정신질환의 진단 및 통계편람 제5판(5th Edition of 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 DSM-5)의 성별불쾌감(Gender dysphoria)*으로 진단명이 변화한 것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5). 

두 번째 이유는 스티그마(stigma)를 줄이고 필요한 보건의료를 잘 이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트랜스젠더의 정신건강 지표를 살펴보면 우려할 만한 수준입니다. 대표적 의학논문인 란셋(Lancet)에서 2016년 발간한 리뷰 논문에 따르면 우울증 척도 점수를 기준으로 한 우울증 유병률은 63-64%의 수준이었고, 임상적 진단을 통한 우울증 유병률은 31-36% 수준이었습니다6). 이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일반인의 평균 우울증 유병률 12%를 훨씬 상회하는 수치입니다. 트랜스젠더 인구집단의 경우 성별불일치 자체로 인한 스티그마와 정신질환으로 인한 스티그마가 동시에 작용하는 불리한 위치에 있습니다.

성별불일치 진단으로의 개정은 '모두를 위한 건강'을 핵심가치로 삼는 WHO가 트랜스젠더의 건강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이중 스티그마를 극복하기 위한 전략이기도 합니다1). 이러한 ICD에서의 진단의 변화는 트랜스젠더의 정신건강의학과 이용에 있어 어떠한 변화를 가져오게 될까요?

트랜스젠더 자체로 인한 스티그마가 줄어든다면 정신과 이용의 문턱이 낮아질 수 있습니다. 김승섭 등의 연구에서 한국 트랜스젠더 중 현재의 진단명인 성주체성장애를 진단 받지 않은 응답자는 전체 조사 대상 인구 278명 중 9%(n=25)였습니다. 이 중 16%(n=4)가 ‘정신장애로 취급 받는 것이 싫어서’라고 응답을 하였습니다7). 모든 트랜스젠더가 호르몬치료나 성전환수술을 고려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보급 된 트랜스젠더 의료표준에 의하면 트랜지션과 관련된 의료적 조치는 비가역적이기 때문에 정신과적 진단 뿐만 아니라 심리적 준비가 되어 있는지에 대하여 정신과 진료 혹은 심리 상담을 통하여 숙고 과정을 충분히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주체성장애’에서 ‘성별불일치’로 진단명이 바뀌게 된다면 ‘장애’ 라는 표현이 주는 부정적인 느낌은 줄어들 것입니다. 이 때문에 정신과 진료 자체에 대한 마음의 부담은 낮아질 수 있습니다.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KCD)의 개정이 2025년에야 이루어진다는 통계청의 발표로 인해 진단명의 변화 과정이 더디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임상 현장에서의 변화는 어쩌면 조금 먼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실질적으로 한국의 정신과 의사들은 각각의 정신질환과 심리상태에 대한 공부를 DSM 진단기준을 통해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정신과적 진단명에 대해 ICD는 임상적 서술과 진단을 위한 가이드라인만을 제시하지만 DSM은 진단기준(diagnostic criteria)을 구체적으로 제시합니다. 그리고 정신과 수련 과정에 가장 중시되는 교과서인 Synopsis of Psychiatry도 당대의 DSM 진단기준을 근간으로 각 진단에 대해 기술하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진단명은 ICD를 기준으로 삼지만 진단명에 대한 심층적 공부는 DSM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DSM의 변화도 정신과 진료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2013년 DSM-5의 개정 이후 성주체성장애(Gender identity disorder)라는 진단은 성별불쾌감(Gender dysphoria)*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이 또한 ICD에서의 변화와 마찬가지로 1) 자신의 부여 받은 성과 경험되는 성의 차이가 생물학적 이유로 생길 수 있다는 과학적 근거를 뒷받침하고 2) 스티그마를 낮추기 위한 노력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변화입니다. 그리고 모든 DSM에 근거한 진단기준은 ‘사회적, 직업적 영역에서의 현저한 고통이나 손상’이 있어야 합니다.

최근 징병 심사를 담당하는 한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이미 징병심사 현장에서는 ICD-10의 성주체성장애(Gender identity disorder)라는 진단명과 DSM-5의 성별불쾌감(Gender dysphoria)이 큰 구분 없이 사용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진단명의 변화만으로 성소수자를 위한 정신과 진료의 질이 높아지긴 어렵습니다. 2016년 기준으로 국내 병원 및 의원 수는 64,999개이고 여기에 종사 중인 의료인 수는 606,182명에 달합니다. 하지만 현재 정규 의학 교육에 트랜스젠더의 건강에 대한 내용이 성주체성장애에 대한 교육 1시간을 제외하면 거의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트랜스젠더에게 적절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의료 기관도 부족합니다.

한국의 트랜스젠더 추정 인구 수는 5만 명에서 25만 명 가량입니다. 적은 인구가 아닙니다. 이전에 시행된 트랜스젠더 연구를 통해 이들의 정신질환 유병률이 높다는 점에서, 그리고 트랜스젠더의 의료적 트랜지션 전후로 정신과적 상담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이들에 대한 정신과 진료의 역량이 높아져야 합니다. 최근 해외에서는 단체와 학회 중심으로 트랜스젠더 진료를 위한 교육 및 수련 과정이 개발되고, 이를 확산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도들이 국내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은 자명합니다. 퀴어 페스티벌에서 본 피켓 문구가 기억납니다. '우리는 여기에 있다'는 이 문구만큼이나 확실한 것은 이들의 정신건강 돌봄에 대한 필요도 여기 대한민국에 있다는 것입니다.

각주

* 미국정신의학회에서 발간한 정신 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DSM-5)에 따른 청소년과 성인의 성별위화감 진단 기준A. 개인이 부여 받은 성별과 경험되고 표현되는 성별의 불일치가 최소 6개월 이상 지속될 시, 다음 중 2개 이상의 항목에 해당될 때 1) 1차 성징 및/또는 2차성징(또는 청소년 초기일 때, 기대되는 2차 성징)과 개인이 느끼고 표현하는 성별의 불일치 2) 불일치로 인해 1차 성징 및 2차 성징을 제거하고 싶은 강한 욕구 3) 다른 성별의 1차 성징 및 2차 성징에 대한 강한 욕구 4) 다른 성별(또는 부여 받은 성별과 다른 대안적인 성별)이 되고 싶은 강한 욕구 5) 다른 성별(또는 부여 받은 성별과 다른 대안적인 성별)로 대우받고 싶은 강한 욕구 6) 다른 성별(또는 부여 받은 성별과 다른 대안적인 성별)의 전형적인 감정과 반응을 지니고 있다는 강한 믿음B. 상기 상태가 임상적으로 유의한 고통을 초래하고 있거나 사회적, 직업적 및 기타 중요한 영역에서 지장을 미침

 

참고문헌

1. Reed GM, Drescher J, Krueger RB et al. Disorders related to sexuality and gender identity in the ICD-11: revising the ICD-10 classification based on current scientific evidence, best clinical practices, and human rights considerations. World Psychiatry 2016;15:205–221

2. ICD purposes and uses, History of ICD. https://www.who.int/classifications/icd/en.

3. 임영택(2018,3,15). ‘게임장애’ 질병화, 2025년까지 한국 적용 안돼…등재 움직임 자체가 문제. <매일경제>. 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8&no=169155

4. WHO, ICD-10 Classification of Mental and Behavioral Disorders, Clinical Descriptions and Diagnostic Guidelines. 2012.

5. American Psychiatric Association. 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 5th Edition(DSM-5). American Psychiatric Publishing, 2013.

6. Reisner SL, Poteat T, Keatley J et al. Global health burden and needs of transgender populations: a review. Lancet 2016;388:412-436.7. 김승섭, 박주영, 이혜민 등. 오롯한 당신(트랜스젠더, 차별과 건강). 숨쉬는책공장,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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