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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핵평화운동의 메시지를 여러분께 전한다"

기사승인 2023.08.16  11: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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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나가사키 피폭자, 오츠카 카즈토시 증언 전문

2023년 8월 7~9일 '원수폭금지 2023년 세계대회'가 일본 나가사키시 시민회관에서 있었다. 한국에서는 보건의료인과 학생들이 참석했다. 아래는 나가사키 피폭 당시 10세였던 O(89세)님의 증언 전문이다. 증언은 대회가 열리던 2023년 8월 8일에 있었다.

 

피폭 순간

내 나이 10살인 국민학교 5학년 때, 집에서 가까운 학교 교정에서 친구와 매미 잡기를 하며 놀던 중(폭심지로부터 3킬로미터 지점), 친구가 "야, 니 쪽으로 매미가 날라가" 라며 소리치던 순간, 번쩍하고 청백색의 강렬한 빛이 하늘을 내달리고 굉음과 지축을 흔드는 듯한 땅울림, 황색의 폭풍(폭발로 인한 거센 바람). 그것만은 내 몸이 기억하고 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는지, 정신이 든 나는 가까이의 망가진 집에 눌려 쓰러진 모양새. 잔해들을 뒤집어쓰고, 허리에서 발목까지 피범벅이었지만 어떻게든 걸을 수 있었다. "니 쪽으로 매미가 날라가" 소리치던 친구는 사라진 채 불러도 대답이 없다. 무서워져 거길 도망쳤다. 거리는 파괴되어 완전히 다른 모습, 인기척이라고는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전혀 몰랐다. 

'버섯구름' 아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원폭은 인류 역사상 첫 번째의 핵무기로 3가지의 위력(열선, 폭풍, 방사선)을 지닌 특수한 핵무기다. 당일 우라가미 상공 5백미터에서 작렬. 12초에 직경 280미터, 섭씨 5천도를 넘는 불덩이로 변했다. 태양이 6천도니, 작은 태양이 지상 500미터로 낙하한 셈이었다.

열선 폭심지 주변의 지면은 3천~5천도. 쇠가 1,500도에서 녹으니, 2킬로미터 지점에서도 화재를 일으켜 불태워버렸다. 밖에 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원폭 폭풍은 모든 것을 파괴하고 날려버렸다. 시속 1,584킬로미터(초속 340미터, 원폭 440미터. 신칸센 속도가 3백킬로미터). 우라가미천주당은 동양 제1의 천주교당 건물. 내가 어렸을 때 상당히 멋지다고 생각한 그 건물도 피폭. 50톤이 넘는 천주당 종루의 종이 300미터를 날려갔다. 종루는 현재 국가지정 원폭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방사선 원폭물질은 폭발시 치사량에 달하는 방사선 물질을 토해내는 살인광선이다. 폭심시 1킬로미터 이내 외부피폭 인간은 즉사. 방사선으로 오염된 물과 음식을 먹고 서서히 신체 내부피폭. 원폭은 1발로 8월부터 12월까지 연내 사망자 7만4천 명, 부상자 7만5천 명, 도합 15만 명이 희생된 소름 끼치는 '악마의 무기'다.

집-묘지-큰아버지네로

피폭한 내가 집까지 어떻게 찾아갔는지 기억이 없다. 바닥을 파내어 만든 큰 구멍 안에 숨었던 엄마, 여동생, 남동생은 무사했다. 엄마가 나를 보곤 "다리가 어떻게 된 거니?" 노엽게 물으셨다. 양다리의 상처를 누더기 천 조각으로 지혈하고 있는데, "불이야! 피해라!!"는 경호 방호단의 목소리가 울렸다. 아버지는 이미 전사해 유골도 돌아오지 않았다. 전쟁에서 병사는 소모품이었다.

가족 4명이 절이 이어진 산 묘지 쪽으로 도망갔는데 거긴 피난민들이 가득 차고, 동네가 한밤중까지 계속해서 불타는 모습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날이 새자 눈길 닿는 곳 모두 재가 된 벌판.

우리는 새까맣게 타고 남은 곳를 걸어 도망쳐 아버지의 형님댁으로 갔다. 미쓰비시조선소 근처였는데, 미쓰비시의 전기, 제강, 무기 공장이 이어지는 군수공장지대다. 우리가 도착한 다음 날인지 그 다음 날엔가 큰아버지가 밖에서부터 큰소리로 "미쓰비시공장이 신형폭탄에 당했다는 것 같다. 요시하루를 찾으러 가야겠다" 하셨다. 요시하루는 전사한 내 아버지의 남동생 이름이다. "아버지 대신이니 너도 가자"며 장남인 나를 잡아끄셔서 어른 4~5명과 폭심지 쪽인 것도 모른 채 근무처인 공장을 향했다

걸어가는 도중은 공포의 연속이었다. 새까맣게 그을린 채 굴러다니는 사체들. 입을 크게 벌리고 사지가 하늘을 향하고 있는 말의 사체. 방화용 수조에는 엄마가 아이를 업은 채 둥둥 떠 있었고, 벼랑 아래 방공호에는 입구까지 당도하지 못한 채 불타는 몸을 끌고 가려는 듯한 사체들. 우리들이 작은아버지를 찾아간 공장은 미쓰비시제강이었다.

원폭의 표적 미쓰비시 무기•제강

내가 국민학교 2학년 때, 일본은 중국을 향한 침략전쟁을 아시아 태평양 지역으로 확대. 적기지공격능력을 보여주려고 미국 하와이 진주만 해군기지 기습 선제공격, 미츠비시어뢰로 미국의 주력전함을 침몰시켜 태평양전쟁을 개시. 이에 미국은 '불의한 공격을 하는 비겁한 일본'이라며 '진주만을 잊지 말자' 국민에게 반격을 호소, 신무기 원폭으로 미쓰비시 무기 공장을 표적으로 삼았다.

'군사 대 군사'의 결말은 이랬다. 미쓰비시 무기공장에는 1만여 명이 일하고 있었는데, 그날 소장을 포함 2,237명이 사망, 부소장을 포함해 5,679명이 중경상, 약 8할이 희생되어, "순식간에 전멸, “작업자 무, 공장 무” ‘죽은 공장’ 으로 기록된다. 구조대 사체수습 작업의 시작이 산 사람을 구분하기 위한 시신 냄새를 맡는 거였다.

왜 나가사키가 원폭을 당했나. 45년이 지난 후 원폭투하의 목적이 밝혀졌다. 미츠비시제강, 무기공장이 목표였다. 원폭 투하 때 언제 투하할 것인지에 대해 당시 계측기관장의 증언이 보도된 바 있다. 미쓰비시공장은 세계 유수의 어뢰 생산 공장이었다

“사라져버린 거리, 살아남은 건 기적이었다. 폭발과 함께 주변은 암흑, 불바다, 피투성이, 타버린 남녀, 타들어가는 연기에 갇혀 있었다. 우라가미강을 목표 삼아 갔던 사람들은 물 속에 시체로 남았다.”

작은아버지 집에서 계속 생활할 수 없게 된 우리 가족은 타고 남은 폐허 근처의 어느 방 한칸을 빌려 생활했다. 얼마 지나 이상한 변화가 내 몸에서 일어났다. 머리카락이 빠지고 잇몸에서 피가 나며, 계속된 설사로 몸이 수척해졌다. 의료시설이나 의사 그 아무것도 없었다. 이웃들이 "학교 쪽을 가 봐라, 거기에 의사가 있다더라" 했다. 산을 등진 덕에 피해가 적었던 학교는 병원이 돼 있었다. 매미를 잡았던 학교로 가는 건 무서웠다. 친구를 놔두고 왔다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사세보 해군병원에서 의사, 간호사가 학교로 와 피폭 환자들을 진료했다. 빈사 직전의 중상자 등 너무 많은 환자가 있었다. 학교는 뒤편 산 덕분에 건물이 그나마 온전했다.

학교를 담당하는 민간의사가 해군소속의 의사들과 함께 진료했다. 2, 3층 교실을 병실로 사용했다.

몸 전체의 화상을 입은 사람들이 많았다. 의사, 간호사의 증언이다. "붕대 교환은 구더기와의 전쟁이었다. 붕대를 풀면 우르르 떨어지는 구더기가 작은 양동이 반을 채운다. 붕대 밑은 극단적으로 말해 ‘구더기집’. 귓구멍까지 구더기가 가득차 있었다. 얼굴이 화상천지로, 부스럼이 얼굴의 가면처럼 툭 떨어져 버리는 형국으로 너무도 비참한 상황이었다. 다들 거의 나체로 작은 천 조각으로 간신히 몸을 덮고 있었다. 남녀노소를 구분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시 간호사의 증언을 옮기면 "몸의 앞뒤를 구분할 수 없었다. 수많은 전쟁터 환자를 봤지만 이건 이 세상일이 아닌 것 같았다. 교실 바닥이나 복도에서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하고 있던 피폭자들. 엄청난 화상으로 몸이 썩어가고 파리가 무수히 끓고 상처에 구더기가 물고늘어져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 약도 소독약도 모두 떨어져 가는 상황이었다. 병원에서 바닷물을 길어와 가마솥에 끓여서 식염수를 만들어서는 물뿌리개에 넣어서 피폭자들에게 뿌려서 구더기를 떨어뜨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그저 '죄송해요, 죄송합니다'라며 한탄했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살았는지 죽었는지, 전신 화상을 입었던 환자. 해수를 끓여 식염수로 사용했던 것을 생각하면서 나중에 알았다. 머리카락 빠지고 잇몸과 소변에서 피가 나는 원폭 증세를 당시 사람들은 아무도 몰랐다.

이후 가족들은

내가 손을 잡아끌고 도망쳤던 남동생은 괴사성 비염으로 서른에 세상을 떠났다. 주치의는 "피폭이 원인인 듯하나 잘 모르겠다. 의사로서 부끄럽다, 죄송하다"며 머리를 조아렸다. 잠 못 자며 간병하던 아우의 아내도 피폭자로, 그의 뒤를 따라 췌장암으로 세상을 떴다.

이건 피폭자끼리 결혼한 내 누나의 아들 관련 신문기사다.

부부 모두 피폭자였던 누나의 아들, "피폭 2세 미야자키군 ‘원폭증’으로 죽다" "원폭은 2세의 목숨까지 앗아가" 라는 머릿기사. 나가사키 시민에게 충격과 불안이 퍼지고, 피폭 2세에 대한 원호를 요구하는 목소리로, 커다란 사회문제가 된다. 월 90만엔의 치료비. "돈 없으면 죽으라는 건가"

미야자키 군은 백혈병으로 2년 반을 고생하다 죽고, 나가사키대학병원에서 부검한다. 췌장, 신장, 비장에까지 암이 전이. 의사는 부모 모두 피폭자라서 암에 더 취약했을 것이라 했다. 미야자키 군 머리맡에 있던 작은 수첩에는 "자유가 있다면 죽어도 좋아"라는 메모가 남아 있었다. 영어회화를 공부하고, 지구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연구하는 지질학자를 꿈꾸던 중학생의 꿈이 꺾였다.

어머니의 죽음을 이야기하겠다. 폭심지에 가까운 미쓰비시 공장에서 철골이나 쓰레기를 운반하는 일용 노동자로 일하던 어머니는 3명의 자식을 위해 점심을 거르면서 일하셨는데 유방암에 걸렸고, 종양의 마귀가 가슴을 물어뜯어도 고약을 붙여서 병을 감추셨다. 암은 신장, 방광, 림파선 등에 전이돼 사망. 어머니를 진료했던 원폭병원의 외과과장이 "이렇게 될 때까지 놔두다니..."고 했지만, 나는 차마 어머니의 상태를 볼 용기가 나질 않았다. 자식 셋이서 엄마 목숨을 다 뜯어 발라먹은 듯해서, 너무도 슬퍼서. 어머니가 의사에게 찬찬히 진찰받은 것은 부검할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나도 이형성 협심증으로 지금껏 치료받고 있다. 대학병원에서는 피폭이 원인이라고 생각되나, 심근경색인지 협심증인지 판별할 수 없어 ‘이형성’으로 진단되었다. 돌발적인 발작을 멈추게 하는 스프레이형 약을 항상 소지해야 한다. 허리는 요추다발성 골절로 입퇴원을 3년여, 내달이 4년째. 재활을 거듭하고 지팡이를 도움 삼아 14~5분은 걸을 수 있으나, 버스나 전철은 탈 수 없다.

원폭 원인 병에 대한 나카사키대학 원폭병원 연구 등

<아사히신문>(2010년 12월 15일) 기사 내용 일부다. "65년 이후에도 늘어나는 '제2의 백혈병' 쉽게 표현하면 '혈액 암'이다. 골수이형성증후군, 방사선을 쐬어 피를 만드는 세포가 암세포를 계속해서 만들어 여러 장기를 파괴한다"

연구의 리더로, 대학교수 시절부터 '원폭이 일으키는 백혈병'의 연구자, 도모나가 마사오 의사는 작년 8월 "(원폭 78년인 2023년 지점에서 작년) 77년 후인 지금도 피폭자를 죽이고 있다" 지적했는데, "원폭은 피폭자가 죽음에 이를 때까지 살해하고, 그 아들과 손주들에게는 '살아가는 불안'을 남기는 소름끼치는 살인무기"다.

핵무기 폐절을 향하여

피폭자가 '공백의 12년간'이라고 부르는 시기가 있다. 미국과 일본 정부의 '원폭피해 은폐와 피폭자 무시, 원폭보도 금지' 정책으로, 구호병원도 폐쇄되어 국가로부터 버려진 세월을 이른다. 그에 항거해 피폭자 원호와 국가의 보증을 요구하며 피폭자가 분연히 일어선 기간이기도 하며, 이것이 ‘원수폭금지 세계대회’의 근원이다.

1954년 3월 1일 미국의 수소폭탄실험으로 참치어선 제5후쿠류마루선이 '죽음의 재'를 뒤집어쓰고,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이어 3번째의 핵무기 피해를 당한 것에 국민들이 충격을 받는다. 원수폭을 금지시키자는 목소리가 끓어오르고, 피폭자들이 일어선다.

나가사키에서는 '나가사키청년모임'이 결성되고, 반신불수로 '휠체어 피폭자'라고 불린 Y님, 얼굴과 목, 상반신에 심한 케로이드가 남아 있는 S님, ‘붉은 등의 소년’ T님, 그들이 활동의 축이 되었다. 이들이 나가사키와 일본사회를 바꾸었다. 나는 이분들과 친했는데, 동생처럼 대해주고 당신들의 피폭체험을 알려주었다. '붉은 등의 소년'은 1년 이상을 엎드린 채 치료받다가 3년이 넘어서야 퇴원했다.

여기서 T님이 남긴 '나의 유언'을 들어봐 달라. "전쟁과 원폭과 전쟁을 일으킨 어른들을 미워해도, 그리고 그 원한이 풀린다 해도, 내 몸은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으며, 원폭으로 죽은 사람들이 돌아올 리도 없다. 원폭으로 죽어간 사람들을 헛되이 죽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죽은 사람들을 대신해 살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자문자답했다. 나가사키를 마지막 피폭지로, 두 번 다시 피폭자를 만들지 않는 활동을 계속해나가는 것이야말로 살아남은 자의 사명이라는 각오를 다졌다."

"제발 눈을 돌리지 말아 달라. 우리들 피폭자는 원폭의 저주스런 손톱자국을 끌어안은 채, 고통을 견디면 살아가고 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지구상에 단 한 발의 핵무기도 남겨서는 안 된다. 내가 마지막 피폭자일 수 있도록 해달라" ‘노 모어 히로시마, 노 모어 나가사키, 노 모어 피폭자’를 외치며 목숨을 건 호소였다.

피폭자의 목소리가 세계에 닿아, 시민, 민주 단체의 힘을 얻어 2021년 1월에 핵무기금지조약이 발효, 핵무기가 금지되었다. 올해 1월 현재 68개국이 비준, 서명국은 유엔가맹국 반수에 달하는 92개국. 흔들림 없는 핵무기금지의 세계 흐름은 커다란 희망이다.

이러한 평화, 핵무기금지조약의 흐름에 역행하여,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속하고, 핵무기사용에 대해 슬쩍슬쩍 내비치며 위협하고, 기시다 내각은 미국이 하라는 대로 '핵무기야말로 유일무이의 안전보장'이라며, 핵무기금지조약을 무시하고, 히로시마 'G7서밋'에서는 '핵억제력'론을 공공연히 주장, 본심을 토해냈다. 유사시 핵무기를 사용해 히로시마, 나가사키와 같은 참화를 일으킴을 서슴지 않을, 인간과 피폭자를 우롱하는 정부는 절대 용인할 수 없다.

이번 세계대회 때 한국대표의 발언을 들었다. “북한이 유엔 안보리 결의를 위반하고 미사일 실험을 하고, 한미일 ‘핵억제력’ 군사대결 강화로 한반도를 둘러싼 상황이 한층 더 위험해졌다”는 인식이다.

마지막으로 여러분께 전하고 싶다.

“이런 중요한 때에 한국에서 오신 분들을 만난 것이 저에게도 중요한 일이다. 여러분들의 활동을, 살아서 그 현장을 목격하겠다. 그것이 나의 피폭체험의 마지막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평화와 핵무기금지조약, 이 흐름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 반핵평화운동의 메시지를 여러분께 전한다.”

“피폭자들에게 남은 시간은 짧지만 여러분들과 함께 걸어갈 것이다. 내 나이 89세. 그러나 '아직 89세'다, 나도 끝까지 여러분들과 함께 싸우겠다. 그리고 오늘 여러분께 받은 선물에 새겨진 '이윤보다 생명이다'라는 표어, 앞으로 내가 피폭 증언이나 강연 때, 꼭 사람들에게 알리고 언급하겠다.

<통역 황자혜, 녹취정리 김기태>

김기태 newcity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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