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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건강논평] 트랜스젠더 혐오가 정치적 힘을 얻지 않도록

기사승인 2024.11.21  21: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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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건강연구소


미국에서는 ‘반 트랜스젠더(anti-transgender)’를 핵심 캠페인으로 삼았던 트럼프가 복귀한다. 한국 언론에서는 비중있게 다루지 않았지만, 트럼프 캠프는 선거기간 동안 오직 두 가지 성별밖에 없다고 말하며 성소수자 집단을 모욕하고 공격하는 정치광고를 쏟아 부었다. 트럼프 당선 이후, 미국의 LGBTQ 커뮤니티는 즉각적으로 ‘엄청난 우려와 두려움’을 표했고, 핫라인의 상담전화 수도 크게 늘었다고 한다.

정치적인 공격과 부정적인 뉴스보도는 실제로 LGBTQ 청소년과 젊은 성인들의 자살생각을 높이는데, 청소년들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학교에서 LGBTQ 청소년에 대한 보호 조치는 매우 효과적이다(관련논문1, 관련논문2), 그러나 트럼프는 LGBTQ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도록 한 정책들을 철폐하고, 성정체성에 대한 교육을 하는 학교에는 재정지원을 중단할 것이라고 말해왔다. 2016년 대선에서 탈진실(post-truth) 정치를 주도했던 데서 더 나아가, 특정한 성적∙인종적∙정치적 소수자들을 포용하지 않겠다는 차별과 혐오를 정치적 자산으로 삼은 대통령의 귀환이다.

그러는 사이 한국에서는 평단의 호평 속에 <딸에 대하여>와 <럭키, 아파트>라는 두 편의 영화가 개봉했다. 20-30대 주인공들이 등장하여 독립된 생계를 해결할 수 있는 일자리를 찾고, 안전하게 함께 살 수 있는 집을 구하고, 가족이나 동료들과 사랑과 존중을 나누는 관계를 갈망하는 삶을 보여준다. 이들이 성소수자 커플이라는 사실만 제외하면, 여느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생계의 문제에 맞닥뜨려 도전하고 좌절하는 것은 똑같지만, 바로 그 이유로 가족이나 이웃들과의 불화가 더해진다. 엔터테인먼트산업에서 더 많은 성소수자의 삶을 다루게 되었지만, 성소수자 정체성이 그들의 곤경을 증폭시키기 때문에 영화적 재현으로서 가치를 갖는 현실은 짚어볼 과제이다. 실제로 한국은 성소수자에 대해 매우 적대적인 사회라는 것이 여러 국내외 사회조사나 세계가치조사 등에서 나타나고 있다(관련자료). 초강대국 대통령의 당선이 이 상황을 더 악화시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이분법적 성별 인식과 성소수자 혐오는 곧 전통적 가족, 도덕적 가족을 호명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미국 선거에서 트럼프와 밴스가 내세운 탈(脫)자유주의(post-liberalism) 또는 반(反)자유주의는 자유로운 개인의 보호 대신 ‘미국인 가족’을 통해 보수적인 가치들로 회귀하고자 한다.

<딸에 대하여>에서 딸의 동성연인을 인정할 수 없는 엄마는 ‘혼인신고를 하고 자식을 낳는 가족이 될 수 없는 너희가 심지어 노년은 꾸려갈 수 있느냐고, 소꿉장난을 그만하라’고 말한다. 엄마는 이성애 가족만이 현실의 삶을 지탱하고 제도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실존하는 성소수자 가족을 없는 존재처럼 여기고, 다양한 가족의 가능성을 부인하는 이런 배타적 가족중심주의는 가족을 떠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자발적 실천에 드러나듯이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렵다.

현대복지국가의 근본원리는 가족이라서 가지는 의무나 책임을 가족이 아니더라도, 심지어 세대가 다른 타인에게까지 미치게 하려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종교적, 계급적, 봉건적 억압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개인들의 사회를 만들려고 했던 그때의 기획들이 지금 왜 작동하지 않는지 따져야 한다.

억만장자의 배를 불리기 위해서 ‘로켓배송의 연료’ 같은 노동에 처하고, 존재하지만 ‘유령 취급받는’ 미등록자 신분도 감수하며, ‘여자들 일이라서’ 후려치는 댓가에도 항의할 수 없고, ‘기여한 바도 없이’ 존망을 염려해야 하는 극한의 기후재난 피해자가 되어야 하는 현실들.

자본주의 생산체제가 만든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도처에서 인간의 생존을 위협할 정도로 극대화되고 있다. 그것을 정상화한 채, 과연 이성애 가족의 생산과 재생산의 궤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사회적 보호를 달성할 수 있겠는가. 성별분업에 기반한 이성애 가족은 근대자본주의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 이상화∙자연화되었으나, 중층의 억압과 수탈이라는 파괴적 원리만 남은 오늘에 와서 작동을 멈춰선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더욱이 가족이 생산과 재생산의 문제에 봉착했을 뿐만 아니라, 돌보는 관계의 책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려야 한다. ‘정상 가족’에게 맡겨진 의무와 기대만으로는 고령자나 장애인, 아동과 환자에 대한 돌봄 필요와 서비스가 제대로 충족되지 못하고 있다고 곳곳에서 아우성이다. 이마저도 돌보는 관계를 자처하는 ‘비정상 가족’에게는 허용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바람직한 인관관계’로서 좋은 돌봄은 규범적 접근이나 생물학적 본질주의, 젠더 편향을 벗어난 사회적 구성물이어야 한다면(우에노 지즈코, <돌봄의 사회학>), 오히려 더 많은 ‘비정상 가족’의 경험과 실천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지난 10월 한국의 동성부부 11쌍은 동성가족의 가족구성권을 요구하는 혼인평등소송을 시작했다(관련기사). 이 소송은 성소수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차원을 넘어, 이 시대의 가족이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묻는 것이기도 하다. 통치와 이윤 생산의 기초가 아닌 지속가능한 사회 속에서 더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위한 개인들의 공동체로서 가족을 상상한다면, 그 새로운 가족의 원리가 적용되는 생산과 소비, 정치와 문화의 규범은 지금과 전혀 다를 것이다. 그 기초는 누구든지 신체조건∙사상과 종교∙성적 지향과 사회적 신분 등에 따라 차별받지 않고, 교육받고 일하고 아플 때 치료받으며 인간답게 생존할 수 있는 권리여야 한다. 그런 점에서 ‘정상가족’ ‘신성한 가족’을 호명하는 세력에 맞서서 다양한 행위 주체들이 더 치열하게 한계에 이른 가족의 현실을 폭로하고 계급투쟁의 장으로 변모시켜야 한다.

존재가 지워지고, 존중받을 권리를 박탈당했던 트랜스젠더들이 서로 안부를 나누고 지지하는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11월 20일)이 다가온다. 그 어느 때보다 “트랜스젠더 혐오가 정치적 힘을 얻지 못하도록 하자”는 결의에 연대하는 시민들의 마음을 모아야 할 때이다.

* 이 글은 프레시안, 라포르시안과 공동 게재됩니다.

* 시민건강연구소는 모두가 건강한 사회를 지향하는 비영리 독립 연구기관으로서, 건강과 보건의료 분야의 싱크탱크이자 진보적 연구자와 활동가를 배출하는 학술운동 시민단체입니다. (http://health.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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