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건강연구소
이것은 성평등과 여성의 웰빙을 달성함으로써 번영하는 경제와 건강한 지구를 만들 수 있다며 유엔이 올 해 ‘3.8세계여성의 날’을 기념하며 내건 슬로건이다. 연례적으로 이 날을 맞아 국내외에서 발표되는 여러 성별 격차 통계들이 가리키는 명백한 방향은 어느 사회에서나 체계적으로 발견되는, 남성에 대한 여성의 열위이다.
국내 신문기사를 몇 개만 찾아보더라도, 생존과 안전, 노동의 기회, 소득과 자산, 정치적 대표성, 기술진보의 혜택 등 다양한 영역에서 여성은 남성보다 적은 기회와 몫을 차지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대신 여성들은 제대로 된 보상과 인정이 없는 비공식노동이나 돌봄 노동을 떠맡고, 페미니즘에 대한 적대적 공격의 피해를 감당하고 있다(관련기사: ‘구조화된 성차별 없다‘는 윤 정부, 여성 차별 가속화하고 있다“, ‘메갈’ 운운 남성동료와 말다툼했더니 해고 통보).
이런 상황에서도 윤석열정부는 국가 성평등정책 주무부처인 여성가족부를 유명무실화하고 있다. 한국을 포함해 전세계 191개(2021년 기준) 국가는 1995년 유엔의 권고에 따라 ‘여성정책 전담 국가기구’를 독립된 정부부처나 조직체계로 두고 있다. 그럼에도 윤석열정부가 반페미니즘을 앞세워 지지자들을 선동하고 ‘여가부 폐지’로 상징되는 국가 성평등정책의 퇴행을 주도하는 것은 국제적 규범에도 어긋날뿐 아니라, 우리 정치공동체의 정신을 크게 훼손시키기 때문에 그 책임은 더욱 크다.
그렇다면 성평등을 위한 투자는 무엇인가. 성평등을 경제 발전과 인적자원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은 세계경제포럼이나 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 같은 조직의 시각이다. 1990년대에는 인권 담론 차원에서 여성의 기본권과 지위를 보호하려고 했다면, 2000년대 이후에는 경제적 차원에서 여성의 노동과 사회적 기능을 계량화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여성인권 이슈인 여성대상폭력과 관련해서도 이런 작업이 이루어졌다(관련자료1, 관련자료2). 세계은행은 폭력피해여성에 대한 치료와 사회서비스 제공, 가족내 역할 및 노동 손실 관련 비용을 추산하는 보고서를 내고 있는데, 일부 국가에서는 이 비용이 국가 GDP의 최대 3.7%에 이른다고 한다.
같은 맥락에서 여성들이 임신중지를 선택할 수 없는 경우, 교육과 노동 그리고 건강한 삶의 기회를 잃기 때문에 막대한 재정적 고통과 손해가 유발된다거나, 안전하지 않은 임신중지 시술과 이후 합병증 치료때문에 개인과 사회가 상당한 의료비를 지출한다는 연구들이 발표되었다(관련연구1, 관련연구2).
따라서 여성들의 사회경제적 기여와 참여를 더 많이 이끌어내기 위해서 여성에 대한 폭력을 없애고, 여성들이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는 임신중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경제성장을 최우선으로 삼는 신자유주의 개발국가가 지향해야 하는 방향이다.
하지만 한국의 상황은 어떤가. 2019년 낙태죄 헌법 불합치 판결 이후에도 정부와 국회는 후속입법을 제정하지 않고 있어 현재 임신중지를 공적 의료보장체계 내에서 이용할 수 없는 상황이다. 또한 여성대상폭력에 대한 기본법 체계를 구축했지만, 피해자 보호를 무력화하는 독소조항을 포함하고 있고, 교정효과를 기대할 수 없는 형사사법 처분을 내리고 있다. 가장 극단적인 폭력인 여성살인에 대해서는 기본적 통계조차 갖추고 있지 않다. 2009년 가정폭력에 한해 사회적 비용을 2조 821억으로 추산한 바 있으니, 다양한 여성대상폭력과 임신중지 관련 지출을 포함하면 그 손실은 막대할 것이다. 무슨 이유로 국가는 여기에 개입하지 않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투자의 개념으로 인간의 기본권에 접근하는 방식에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권을 보장하는 것은 자격과 무관한데, 역량개발을 목표로 하는 투자는 반드시 기대하는 성과 평가를 결부시키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체제에 근간을 둔 투자-성과 모델은 개인간 성취의 차이를 능력주의로 해석하고, 사람들을 체제가 필요로 하는 능력에 따라 위계화시키며, 집단 내외부의 불평등을 방치 혹은 조장함으로써 성과를 촉진하려 든다. 결국 인적자원에 대한 투자는 자본주의가 젠더불평등을 개인화한 방식으로 다시 차용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을 차등대우하며 강압하는 귀결을 피할 수 없다.
설령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이 공고해서, 경제적 관점으로 우회하는 전략을 택할 수 밖에 없을 때조차 젠더불평등한 사회구조의 타파를 정확하게 목적하지 않으면 효과가 없다. 정부는 3.8 세계여성의 날 기념사를 통해 여성의 사회참여 확대와 일·가정 양립시스템을 통해 국가 경쟁력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그렇지만, 현재의 경제적 토대를 구성하는 성별분리적 노동구조, 노동체제 기저의 성차별적 사회문화, 인간은 모두 존엄하다는 젠더평등의 가치를 고려하지 않는 국정 철학을 그대로 두고서는 지금같은 여성에 대한 불균형적 영향은 심화될 수 밖에 없다.
가정과 일터 그리고 삶의 모든 현장에서 발생하는 여성혐오와 젠더불평등에 따른 고통과 모순이 그것을 구조화하는 억압적 제도와 공고한 이해관계를 저절로 파괴하지는 않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시스템을 지속하기 위해 여성의 생산노동과 재생산노동을 구분하고 그 둘을 체제 하부에 값싸게 편입시키려는 국가와 자본의 허위와 한계를 폭로하는 것이다. 또한 사회적 자원과 권력의 배분이 경쟁하는 개인들 간의 불평등과 차별에 기반하는 것이 아니라, 평등하고 자유로운 시민들의 삶을 보장하겠다는 국가이성에 의해 이루어지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크게 기울어진 질서와 판을 바꾸기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광장과 거리에서의 더 넓고 깊은, 그리고 지속적인 여성들의 연대와 저항일 것이다.
[참고문헌]
*문유경, 2009. 성인지적 예산분석 사례(2) 가정폭력의 사회적 비용 추정. 한국여성정책연구원
* 이 글은 프레시안, 라포르시안과 공동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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