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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힘든 일 모두 놓으소서"

기사승인 2019.05.27  13:4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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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일 새오름가정의원 황승주 원장 발인...서홍관 교수 추도사 전문

황승주 선배님, 선배님이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저는 제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선배님은 저희 후배들에게 유신독재와의 투쟁에 있어서 전설 같은 분이었지만, 또한 온유함과 겸손한 모습으로 언제나 삶의 귀감이 되어주셨습니다.

선배님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2월 3일 황해도 연백에서 태어나셔서 태어난 지 열흘 만에 가족들이 피란을 나와 인천 앞 무의도에 거주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인천에서 하숙하면서 중고등학교를 다녔고 1969년 서울의대에 입학하게 됩니다.

그때는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이 장기집권, 종신집권을 향해 치달을 때였고 이에 반대하는 인사에 대해서는 가차 없는 인권유린과 폭압을 행사할 때였습니다. 그에 따라 학원가와 재야와 정치권에서 민주화를 외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학생운동의 무풍지대였던 서울의대에서도 우리나라 최초의 보건의료운동조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회의학연구회가 1970년 9월 결성되었고, 선배님은 이 단체의 회원이 됩니다.

황 선배님은 훌륭한 의학자가 되고 싶어 열심히 공부를 하셨고, 본과 1, 2학년 계속 서울의대 수석을 하셨지요. 공부에 열심이던 의학도는 1971년도 10월 위수령이 나면서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총을 든 군인들에 의해 쫓겨납니다. 이때 “사회와 역사가 엉망이 되어가고 있는데, 내가 의학자가 된다 해서 그것이 바르게 사는 것일까?” 고민이 시작되었고, 황 선배님은 사회를 바로잡는 일에 나서기로 했습니다.

박 정권이 1972년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임명하고, 대통령도 간접선거를 하게 되는 민주주의의 상식에도 어긋나는 시월유신을 만들어놓고, 1974년 1월 헌법조차 무시하는 ‘유신헌법을 반대 부정 비방하거나 개헌을 주장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하고, 위반자는 영장 없이 체포하고 군법회의에서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긴급조치를 발동하자, 본과 3학년이었던 선배님은 긴급조치 해제를 외치는 서울의대 시험거부사건을 주동하였고, 수배를 당하고 도망치게 됩니다. 이 시위는 긴급조치에 반대하는 대학가 최초의 학생시위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974년 봄이 되자 민청학련이 결성되었고 4월 3일 전국적인 시위가 계획되었을 때, 중랑천변 판잣집에 숨어살던 황 선배는 서울의대 시위를 주동하기 위해 눈에 안대를 대고 환자로 위장해 택시를 타고 의대로 진입했고, 시위가 이루어졌습니다. 민청학련은 대학과 고등학교까지 전국적인 시위를 계획했지만, 저들이 철저히 탄압하는 바람에 막상 시위가 성사된 곳은 4군데밖에 없었고, 서울의대는 그 중 하나였습니다. 민청학련의 서울의대 책임자로 지목된 황승주는 다시 도망을 다녀야 했습니다. 그러나 형사들이 황승주 선배를 잡기 위해 어머니와 형을 괴롭혀서 어머니는 아들이 빨갱이가 되었다는 말을 그대로 믿고 실망하시고, 형은 형사들이 빨리 동생을 잡아내라는 말에 직장도 그만두고 동생을 찾으러 다닌다는 말에 황 선배는 자수를 결심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자수를 하는 것이 저들에게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후배들에게 알리기 위해 네 번째 손가락 한마디를 잘라 혈서를 써서 당시 도피 중이던 동지 양길승을 만나 건넸고,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부둥켜안고 울었다고 합니다. 이 날을 기억하기 위해 도피중이던 사람들의 금기사항의 하나였던 사진을 찍었다지요. 황 선배는 이 사건으로 기소유예로 풀렸났으나 학교에서는 이미 제적당한 상태였습니다.

▲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사건체계도>, 하단 붉은 색 표시에 '서울의대책 황승주'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지요. 75년 11월 중앙정보부는 ‘서울의대 간첩단 사건’을 터뜨렸습니다. 서울의대 본과 2년생 재일교포 유학생 강종헌을 간첩으로 지목하여 이와 접촉한 학생 70여 명을 대거 연행하고 그중 16명을 구속했는데, 중앙정보부는 황 선배님을 다시 잡아들였고, 혹독한 구타와 고문이 이어졌습니다. “저들은 이미 나를 간첩의 하수인으로 시나리오를 짜놓고, 자백을 강요하고, 나는 이렇게 고문받다가 형식적인 재판을 받고 사형당하는구나”고 생각했고, 자살을 결심했다고 합니다. 자살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 더욱 큰 고통이었을 뿐입니다. 황 선배님은 간첩불고지죄에 대해서는 무혐의처분을 받았으나 불온서적을 봤다는 이유로 반공법 위반, 그리고 김지하의 양심선언을 돌려봤다는 이유로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3년 징역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습니다(간첩이라던 강종헌도 결국 2013년 서울고법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으며, 황 선배도 훗날 재심에서 무죄로 판결남).

고문과 구타로 육신과 정신이 만신창이가 된 선배님은 ‘하느님이 계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에서 신학공부를 하셨습니다. 하루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어려운 이유가 스스로 예수님처럼 살지 못하는 것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집안에 있던 아이 우윳값과 어머니 용돈까지 들고 예수님의 제단이 바치신 적도 있다고 합니다. 그만큼 구원의 문제에 절실했던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1981년부터 경기도 용인군 남사면의 시골교회에서 ‘작은 자들을 위해’ 8년간 목사로 일하셨습니다.

그리고 먼 길을 돌아 1994년 서울의대에 복학하셨습니다. 그때도 가장으로서 가족 생계를 해결하지 못해 무척 힘들었다고 들었습니다. 27년만에 의대를 졸업하는 진기록을 세우고 2000년 가정의학과 전문의가 되셨습니다. 서울대학교병원에서 레지던트 과정을 밟을 때 나이가 거의 50이 되셔서 육체적으로 힘드셨지요. 그러나 둘째 따님이 고1이었는데, 미술을 전공하고 싶었는데 학원비가 없었습니다. 황 선배님이 “학원비 대기가 힘드니 공부로 대학을 갈 수 없겠냐”고 물으셨다고 합니다. 따님이 ”제가 신문배달을 해서라도 미술학원을 가겠다“ 하자 하는 수 없이 낮에 레지던트 근무하고, 밤에 다른 병원에서 야간당직을 해서 학원비를 벌었다고 합니다.

▲ 목사이자 의사인 황승주 원장은 말기 암 환자의 호스피스 완화의료에 평생 헌신했다.

2000년 가정의학 전문의를 따고 무의촌 진료 봉사 활동 때 인연을 맺은 시흥의 신천연합병원(원장 양요환)에서 원목 겸 가정의학과 의사로 환자들을 진료하기 시작하셨습니다. 하루는 말기 위암 환자가 ‘자기가 어렵게 힘들게 살다가 이제 살만하니까 말기암으로 죽어가는 현실 앞에서’ 절망하는 모습을 보고, 육신도 중요하지만, 영적인 치유가 중요하다는 점을 깨닫고, 호스피스 진료에 사명감을 가지게 되셨습니다.

2004년에는 말기암 환자들을 위한 ‘새오름 호스피스’라는 비영리단체를 만드셨고, 지역사회 중심의 완화의료 기관 설립에 나서셨고, 2014년 새오름가정의원을 열었습니다. 이후 말기 암 환자들의 질병과 영혼을 치유하는 일에 나서셨습니다.

황승주 선배님, 저는 서울의대의 후배로서, 또 사회의학연구회의 까마득한 후배로 선배님을 멀리서 존경해오다가, 선배님이 제가 전공한 가정의학과를 선택하셔서 뜻밖에 같은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제가 국립암센터 국가암관리사업본부장이 되었을 때 선배님이 호스피스 사업에 몰두하셔서 저로서 자주 뵙게 되어 기뻐했던 기억이 납니다.

황승주 선배님, 우리나라가 좋은 나라였다면, 의대 교수가 되셔서 좋아하는 연구를 하고 온화한 음성으로 학생들을 가르치셨을텐데, 너무나 혹독한 고초를 저들에게 당하셨구나 생각하면, 억울하고 분해서 눈물을 그칠 수 없습니다. 이제 힘든 일 모두 놓으시고 천국에서 행복하게 지내소서.

- 서홍관(국립암센터 의사. 시인)

▲ 2014년 개원한 새오름가정의원은 지역사회 중심 완화의료기관으로 의원급으로는 드물게 가정형 호스피스를 진행했다.

김기태 newcity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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